시선과 여백의 문법 신생 제5호에서
이성희
1. 2개의 시선
푸코는 그의 저서 {말과 사물}에서 서두를 벨라스케스 <시녀들>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는 집요하고 세심한 분석을 통하여 한 장의 그림 속에 얽혀 있는 시선의 복잡한 위상을 밝히고자 한다. <시녀들> 속에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복잡한 시선을 교차시키고 있다. 반면 송대 마원(馬遠)의 <고사관록도(高士觀鹿圖)>에서는 단 두 명의 인물만이 등장한다. 고사(高士)로 추정되는 인물과 그의 시동이다. 그러나 섣불리 속단할 일은 아니다. 이 그림 속의 시선 역시 만만찮은 함축과 복잡한 위상을 이루고 있다.
이 글은 두 그림 속에 나타난 시선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서구 근대의 여명기인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벨라스케스와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었던 송대의 마원은 각각 자신의 그림 속에 두 문화의 전통뿐만 아니라 향후 전망을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그림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시선 속에 각각 코드화되어 있다. 서구의 근대가 제국주의의 세계 지배를 통하여 결국 보편화된 근대가 되었다면 이 시선들이 이루고 있는 코드를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근대에 대한 반성과 동아시아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까지 욕심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녀들>에서 우선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왼쪽에 놓여져 있는 거대한 캔버스의 뒷면이다. 그것은 화면의 왼쪽을 가리면서, 동시에 앞면에 그려지고 있을 그 어떤 심연을 비가시성으로 드러낸다. 다음으로 우리의 시선은 그 캔버스 앞의 화가, 그리고 오른쪽 창문에서 어두운 실내 전체를 관통하면서 흐르고 있는 빛을 거슬러 공주와 그를 둘러싼 시녀들, 개, 난쟁이, 약간 뒤에 서 있는 환관과, 뒷면 열린 문으로 막 실내에 들어서려는 방문객, 그리고 그림의 거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희미한 반영의 거울까지 일주하게 된다. 그러나 시선의 회전 운동은 그림 속 인물들의 집중된 응시에 의해 고정된다. 그들은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푸코는 시녀들의 공간을 형성하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배치 및 그것을 형성하는 빛의 체제, 응시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림 구성의 중심 테마이면서 주체가 왼편의 거대한 캔버스의 앞면,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앞면에 그려져 있는 동시에 그림 바깥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중의 의미에서 비가시성의 영역에 위치한 모델인 두 명의 주권자, 즉 왕과 왕비임을 추적한다. 이 주권자들은 그림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비가시성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시선에 의해 전제된 장소이다. 왕과 왕비는 비가시성 속에 놓여 있지만 우리가 좀더 세심하게 관찰한다면 뒷면의 거울을 통하여 모든 인물의 배후에서 희미하게 가시성의 영역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울 속에 반영되고 있는 두 얼굴은 캔버스의 보이지 않는 앞면에 재현되어 있는 얼굴인 동시에 그림 안의 모든 인물의 시선이 모이는 점이다. 거울에서 나오는 가상의 선과 공주의 눈에서 나오는 시선은 이들에게 수렴된다. 그리하여 비가시성과 가시성의 흐릿한 경계에서 드러나고 있는 주권자들을 반영하는 거울은 그림의 중심을 이루는데 <시녀들>의 소실점은 바로 이 거울에 있다. 그림 속의 모든 선들은 이 자리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림의 바깥에 위치하여 그림 전체를 응시하며, 동시에 거울을 통하여 실내 전체를 훔쳐보고 있는 이 왕과 왕비의 자리는 동시에 그림 감상자의 눈이 자리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왕과 왕비의 눈과 우리의 눈을 일치시킴으로써 또한 시각의 주권자, 주체가 된다.
이제 마원의 <고사관록도>를 보자. 그림은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를 나누는 대담한 대각선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계곡의 물이 이 대각선의 경계선으로 화폭 전체를 가로지르며 흐른다. 물은 보이지 않는 여백의 세계에서 흘러나와 보이는 이쪽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다. 그리하여 물은 가시성의 세계와 비가시성의 세계의 경계를 이루면서 굽이를 튼다. 물은 어쩌면 태극의 형상을 그리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물은 굽이를 틀며 양쪽 경계를 침투하면서, 양쪽을 한 화폭 속에 나누면서 모은다. 흐르는 물은 유와 무를 가로지르며 약동치는 기의 흐름이기도 하다. 선비는 그 경계의 물을 사슴이 마시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슴은 또한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우주동물의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며 여기서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매개하고 있다.
이 그림의 핵심적 기호는 산도, 물도, 사슴도 아니다. 그것은 여백이라는 전혀 문법을 달리하는 기호이다. 서구의 미술사가들이 그 박람강기를 전시하는 도상학적 해석이 불가능한 자리가 바로 이 여백이다. 그러나 이 자리는 동아시아 산수화와 예술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며, 동아시아적 정신 경계로 들어서는 문이다. 실제로 이 그림 속의 산, 물, 사슴은 이 여백의 경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호들인 것이다. 이들 기호들이 고정된 기의를 벗어나서 서로의 안으로 침투할 때 "고립된 이미지를 넘어선 경계가 드러나게 된다[境生于象外]." '이미지를 넘어선 이미지[象外之象]' 속으로 마원의 붓은 이제 스며든다.
우선 간단히 <고사관록도>에 얽히는 시선을 도해해 보자. <표 1>에서처럼 화가(마원)의 시선은 대각선의 한쪽으로 향해 있다. 그의 시선은 일단 보이는 세계를 보며 그 속에서 사물들의 형상을 건져 올리고 있다. 한쪽의 여백으로는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을 보는 사람도 화가의 시선을 따라 먼저 뚜렷이 드러난 쪽의 근경(近景)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는 화가가 비워둔 곳을 관조[觀]하고 있는 시선(선비의 시선)을 만나게 된다. 그 시선을 좇아 비로소 우리는 왼쪽의 여백을 보게 된다. 시동의 시선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실은 이중적이다. 우선 시동은 선비의 시선을 좇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 화폭의 가장 오른쪽 끝에 서 있는 시동의 시선은 그림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얽히는 모든 시선들을 관조하고 있는 것 같다. 화폭의 제일 끝에서 전체를 보고 있는 시동. 이는 암암리에 시동이 화가 자신의 눈을 대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시동의 시선의 이중성은 다음에서 말하는 이 그림 전체가 가진 이중적 시선과 상응하고 있다. 그림을 보자.
선비의 시선은 보다 정확히 말해서 물가에서 물을 먹고 있는 사슴을 향해 있다. 그러나 사슴은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를 이어주는 존재이며, 따라서 사슴에 닿는 시선은 그 너머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시선 B→D는 연장되어 E에 이르게 된다. (E는 또한 사슴의 시선을 통하여 나타나는 물에 비친 허공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그리하여 감상자가 A→B→D→E의 일련의 추적을 끝내는 순간 그는 A→E로 이어지는 즉각적인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된다. 이 두 개의 시선의 라인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갖는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이후에 세밀하게 분석하게 될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마원의 <고사관록도>에 교차하고 착종하는 시선들, 그리고 은폐된 시선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 것들인가? 그리고 어떻게 다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원근법, 서구 근대의 시선
20세기 인문사회과학의 텍스트 독해의 기본 모델은 언어학이었다. 소쉬르, 야콥슨 등에 의해 정치하게 발전된 언어학은 구조주의의 분석틀로 자리잡으면서 이후 인문사회과학의 토대 과학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중문화, 영상문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적 변동을 통해 텍스트 독해의 모델이 '관객성'과 '시각성'의 모델로 대체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미첼(Mitchell)은 '언어학적 전회'에 비견하여 '그림적 전회'라고 명명한다. 실로 오늘날은 이미지의 시대이다. 단순한 이미지 소비를 넘어서 이미지 중독의 증후가 확산되고 있다. 이제 이미지는 우리 시대의 중심 코드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탐닉은 이 시대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선언하는 헤브라이즘은 시각에 대해서 다분히 부정적이었다. 유대의 신은 틈날 때마다 눈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으며, 눈이 보게되는 이미지-우상에 대하여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일을 상기해 보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난 다음 제일 먼저 일어난 현상은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들의 몸의 자연을 가리기 시작했었을 때 타락은 시작되는 것이다. 눈의 역사는 타락의 역사이다. 반면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분명 시각에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의 최고 형이상학의 개념인 '이데아'(idea)란 말 자체가 '본다'는 것에서 연원하며 외양이나 이미지 등과 결부되어 있다. '이론'(theory)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 'theoria'의 동사 'theorein' 역시 '본다' '주의 깊게 바라본다'는 시각적 의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가 우리에게 남긴 저 위대한, 아직도 살아서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는 대리석 덩어리들을 보라.
서구 근대의 출발점을 이루는 르네상스가 기독교 전통의 중세로부터 탈출이라고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그리스적 시각 문화의 복권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 같다.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역사적 운동의 중심에는 분명 회화와 조각이 있었다. 좀 거칠게 말한다면 중세의 극복이란 시각의 회복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르세상스에서부터 시작된 유화와 더불어 이어진 서양회화의 역사는 그야말로 찬란한 시각중심주의, 보고자 하는 시선-소유의 역사였으며, 그것은 기어코 오늘날 문화의 중심양식으로 절정에 이르러 있다.
시선, 그리고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르트르에 의하면 시선에는 이미 인식 행위 자체의 정복자적 속성과 소유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고 따라서 보여진 객체는 그것을 보는 주체에 종속된다. 시선의 역사는 소유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프랑스어 <savoir>(알다)라는 말속에는 <avoir>(소유하다), <avoir>속에는 <voir>(보다)가 내재되어 있다. 알다, 소유하다, 보다는 서로 미끄러지는 기표들인 셈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르네상스시대의 예술가들에 있어서 회화는 인식의 수단이었으며 소유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르네상스 회화에 관하여 생각할 때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은 피렌체나 기타 도시에 구축되어 있던 거대한 자본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이다. 또 이탈리아의 부르주와 상인들에 있어서 화가들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나 원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한 도구이었다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다. 서양 근대 철학의 서막을 요란하게 장식했던 것이 인식론의 문제였다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서양 회화의 역사는 서양 철학의 역사를 선취하고 있다. 눈은 사유보다 빠르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원근법이다.
주은우는 현대성의 시각양식을 원근법에서 찾고 있다. 그에 따르면 원근법이란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기획을 시선의 기획 속에서 선취하고 있다. 즉, 원근법을 통해 구성되는 시각적 주체는 코기토로 압축되는 서구 현대성의 주체와 상응한다. 그리고 원근법의 합리화된 시각 공간은 동질적이고 무한한 데카르트의 연장으로서의 공간과 부합하며, 이 시각 공간에서 소실점에 자신의 눈이 위치되는 주체는 확실성의 유일한 근거이자 보편수학의 원리에 의해 세계를 측정하고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사유와 의지에 따라 세계를 통제하려 하는 코기토의 기획과 일치하는 것이다. 원근법의 중심을 지나가는 눈은 주체이며, 이 주체는 세계를 보고, 세계를 대상으로 구성하고, 소유한다. 원근법에 의해 보이는 대상을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시각양식은 그 시대 절대왕권 권력구조의 기반과 동화되어 지배를 위한 도구가 되고, 이러한 시각양식은 서양 식민주의의 선봉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원근법의 원리를 실제로 발견한 사람은 부르넬스키였으나 그것을 회화의 이론으로 정립한 사람은 알베르티이다. 그러나 알베르티는 부르넬스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실재하지만 감지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향으로 원근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실물 그대로를 그린다는 사실주의 정신의 실현이다. 이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은 서양 회화사에 끊임없이 작용하는 일종의 반복강박이다. 심상용에 따르면 모더니즘 미술 역시 내면까지 가시적 영역으로 끄집어내려는,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게 하라"는 폴 클레의 선언으로 대표되는 인식의 과열된 욕망, 즉 소유의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인식의 과열된 욕망, 시선의 승리주의의 극점에서 우리는 '포르노'를 만나게 된다. 포르노는 더 많이 보고, 빠짐없이 확인해야 한다는 인식의 과도한 욕망이 줌과 클로즈업의 기술적 지원과 협력하는 곳에서 잉태된 인식론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중독 현상은 일종의 '의사포로노현상'이다. 이들은 모두 시각중심주의, 시선 승리주의라는 공통된 근대적 전략 하에 조직된다.
<표 2> <표 3>
다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자. 여기에 나타난 시선의 교차들을 간단히 도식화하면 <표 2>가 된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그림 속에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다만 CD의 선에 배열하고 있다고 보자. 표에서 실제 그림을 이루고 있는 공간은 ABCD이고 CDEF의 공간은 숨겨져 있는 비가시성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비가시성의 공간은 이 그림 원근법의 의미상의 소실점을 이루고 있는 거울을 통하여 그림의 뒷면에 반영된다. 거울은 비록 왕과 왕비의 모습만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실제 거울 속에는 CDEF의 공간이 모두 들어 있다. CDEF공간을 옮겨서 거울과 왕•왕비의 자리를 일치시켜 보자. 그러면 <표 3>이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거울(왕)이 마치 카메라 옵스큐라의 구멍이나 카메라의 렌즈와 같은 자리임을 보여준다. 혹은 하나의 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CD는 왕의 눈을 통하여 실재가 재현된 망막의 상이거나 스크린이다. 왕의 눈은 카메라 옵스큐라, 즉 어두운 상자 같은 이 그림 전체의 인물들을 보고, 구성하고 소유•지배하고 있다. 감상자인 우리는 이 권력의 소실점에 우리의 눈을 종속시킴으로써 시각적 주체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시녀들>은 근대 국민국가의 틀이 갖추어지던 이 절대군주제 시대에 시각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은 곧 이 주체가 군주의 응시에 종속되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시녀들>의 원근법은 이 군주 권력의 응시를 가동시켜주는 것이다. 즉, 17세기 현대성의 시각은 군주의 시각이며 권력의 시각이다. 그 군주의 자리가 우리의 시각을 지배하는 큰타자(라깡)의 응시이며 이데올로기(알뛰세르)의 자리이다. 우리는 이러한 큰타자의 응시와 이데올로기의 시각에 우리의 눈을 맞춤으로써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이다.
3. 삼원법, 동아시아 산수화의 시선
르네상스시기의 풍경화의 등장은 서양 미술사에서 시선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미술사적인 사건으로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풍경화의 정신은 다른 모든 인식론들로부터 시선의 인식론이 자립하기 시작하는 곳에서 미술사에 편입되었다. 반면 동아시아에서 산수화는 훨씬 이른 시기에 전혀 다른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등장한다. 산수화는 4-5세기의 위진남북조 시대, 시선의 욕망과 구속을 넘어서고자 했던 노장사상과 그의 적자인 현학(玄學)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송대 곽희에 의해서 정립된 삼원법(三遠法)은 서양의 원근법에 비견되는 동아시아 산수화를 위한 투시학의 총결인 셈이다. 삼원법이란 산 아래에서 산마루를 쳐다보는 고원(高遠), 산 앞에서 산 뒤쪽을 엿보는 심원(深遠),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다보는 평원(平遠)이다. 그러나 이 삼원법은 노장사상과 현학의 사상적 조명하에 음미되지 못하면 참으로 초라한 투시법에 불과하게 된다.
한자 문화는 근본적으로 시각적 문화이다. 그것은 한자 자체가 시각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와 장자의 사유는 이러한 언어에 대한 철처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다.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는 {노자} 1장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또한 노자는 "눈을 위하지 마라[聖人爲腹不爲目]"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그리하여 노자와 장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경계는 가시성의 극한에서 비가시성의 가시성으로 드러나는 '현(玄)'이다. 현은 문이다[衆妙之門]. 가시성의 세계와 비가시성의 세계의 통로이다. 이를 '유무(有無)'라고 하기도 하고 '무(無)'라 하기도 한다. 가시성의 세계는 우선적으로 라깡이 말하는 상상계이지만 또한 언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계에 상응한다. 반면 현•무는 실재계가 드러나는 상징계의 구멍이다. 삼원법의 '원(遠)'이란 바로 노장사상과 현학이 추구하는 정신경계인 '현'이며 '무'의 다른 이름이다.
왕필의 {노자주}에 따르면 '현'은 "어둡고, 소리가 없으며, 있음이 없는 것이다[玄者, 冥默無有也]." 기실 현은 아득히 멀고 높은 하늘의 가물가물한 빛을 형용한 말이다. {장자}를 펼치면 느닷없이 우리를 황당하게 만드는 유명한 대붕(大鵬)의 우화가 나온다. 크기가 수천 리나 되는 대붕이 구만리 장천으로 날아올라 남쪽의 하늘못으로 날아간다. 가는 길에 대붕은 그 가믈한 하늘 끝에서 세계를 내려다본다. 이것이 다름 아닌 '원'이며 '현'이다. 구만리 장천으로 날아오르는 대붕은 일체의 욕망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대자유의 정신경계의 소요이며 원법이란 이러한 경계에서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곳은 시선-소유 욕망을 끊임없이 벗어나는 곳이다. 가시성을 추구하는 회화(특히 산수화)가 이러한 비가시성을 추구하는 노장적 정신 경계의 실현이라는 데 동아시아 회화의 긴장이 있다. 이러한 긴장은 비단 회화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미학 전체의 긴장이다. 위진 시대의 문학가인 육기 역시 "모두 시선을 거두고 듣는 것을 멈추어라[皆收視反聽]"([文賦])고 권하고 있으며 당(唐)의 부재(符載)는 장조(張璪)라는 위대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그림을 그릴 때는 이미 신묘한 기교는 내버린 채 뜻이 그윽하고 현묘하여 사물이 마음속에 있고 눈이나 귀에 있지 않았다." 동아시아 미학은 '보이는 것[象]'을 통하여 시선을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것[象外之象]'에로 나아가려는 긴장, 시선을 통하여 시선을 넘어서려는 긴장인 것이다. 장자의 포정 우화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포정이 소를 잡는 데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여주자 왕이 기술[技]이 어쩌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에 대해서 포정은 이는 기술이 아니라 도(道)이며 이에 도달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온 모습을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神]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이 남습니다.
포정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아갔다. 즉, '눈[目]'에서 '정신[神]'으로 나아갔다. 눈에 얽매이는 것이 기(技)라면 정신에 이른 것이 도(道)이다. 동아시아의 모든 예술이 추구하였던 경지란 바로 이러한 시선을 넘어서는 데서 만나는 정신의 경계이며, 그것을 가리키는 기표가 현이며 무이다. 이러한 경계를 가장 대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그림의 하나가 바로 마원의 <고사관록도>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에 두 개의 시선의 라인이 있음을 보았다. A→B→D→E로 이어지는 라인은 타자의 시선과 자아의 시선의 도착이 일어나면서 사물(시선의 대상)에서 사물로 이어지는 일련의 환유적 욕망의 라인이다. 반면 A→E의 라인은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일어나는 깨달음의 시선이다. 시선을 넘어서는 시선이 일어나는 자리다. 전자의 라인에서 E는 일련의 이어지는, 시선의 대상(소유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미지이다. 여기에서 시선은 인식의 욕망이며 소유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후자의 라인에서 만나게 되는 E는 대상을 벗어나는 대상이며, 이미지를 벗어나는 이미지, 즉 여백이다. A→E라는 시선은 실제 그림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A→E에서 E는 실제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시선을 넘어서는 시선의 기표인 '현'이며 '원'이다.
여백, 그 속에서는 모든 시선이 초점을 이루지 못하면서 무화되고 만다. 그곳은 무(無)의 경계이며 혼돈의 자리다. 첫번째 라인에서 단지 시선의 끝자리에 놓인 한 부분을 이루던 여백은 두번째 라인에서는 그림의 전체로 감상자를 엄습한다. 도연명의 시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고개를 들어 유연히 남산을 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동일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국화를 따는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며 남산을 보게될 때 또한 우리는 즉각적으로 남산과 직접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전자의 남산은 구체적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이지만 후자의 남산은 개별적 대상을 넘어서는, 기호를 넘어서는 기호이다. 여기에서 남산은 구체적인 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여백을 이룬다. 그것은 삶의 보다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玄]이다.
4. 시선의 인칭
시선에도 인칭이 있다. 시선은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실 그 누군가란 항상 일인칭, <나>이다. 타자의 시선이란 나(혹은 그 무엇인가)를 보는 타자의 시선을 내가 보는 것일 따름이다. 시선은 언제나 일인칭의 주체를 정립한다. 따라서 시선의 인칭이 성립하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에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보는 시선'이라는 점이다. 즉, 나와 나의 시선이 닿는 그 무엇. 이 그 무엇이 시선의 인칭을 결정한다. 그 무엇에 따라서 시선은 언제나 <나-너>가 아니면 <나-그것>의 시선이 된다. 이러한 분류는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범주를 빌린 것이다.
부버는 그의 심오한 저서 {나와 너}에서 자아와 세계가 만나서 이루는 관계를 <나-너>, <나-그것>이라는 이중적 범주로 제시하고 있다. 부버에 따르면 "<나>, 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 <나-너>의 <나>와 근원어 <나-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시선의 인칭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선이란 세계를 보는 것이고 그것은 동시에 세계에 대한 태도이다. 이 태도에 따라서 <나>가 이중적으로 세워진다.
3인칭의 시선 <나-그것>은 주객의 분리 속에서 성립한다. <나-그것>의 시선은 분류하고 분석하는 시선이며, <그것>은 분석의 대상이 되고 <나>는 대상을 분석하고 쪼개는 시선이 된다. "먼저 보는 눈이 있다. 두번째 보이는 대상이 있다. 세번째는 전자와 후자 간의 거리가 있다."라고 말하는 최초의 서양 풍경화가라고 할 수 있는 뒤러의 말은 3인칭의 시선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지식의 대상이 된다. 지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소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의 세계란 나에게 유용성의 정도에 의해 평가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즉, <나-그것>의 시선은 전형적인 시선-소유의 양식이며 무엇보다도 근대적인 시선의 양식이다. 여기에 시선의 권력이 성립되고 있다.
반면 2인칭의 시선인 <나-너>에는 <나>와 <너>가 따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다. 편의상 2인칭이라고 하였지만 <나-너> 속에는 사실 인칭대명사가 사라진다. <나>도 <너>도 사라지고 <->만이 남는다. 아니 <나>와 <너>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로 현존한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구분이 사라진 '봄[觀]'만 남는다. 왜냐하면 <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대상은 <그것>이다. <너>는 지식이나 분석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직접적이고 전인격적인 관계 자체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너>라고 부를 때 나와 너 사이에는 인칭이 사라진다. 여기에는 만남의 현존만이 있을 뿐이고 지시 대상은 사라진다. 지시와 지식은 과거이고 만남은 현재이다. 현재는 살아 있는 시간이고 과거는 죽은 시간이다. <나-너>는 현재의 시선이고 <나-그것>은 과거의 시선이다.
"모든 <그것>은 저마다 다른 <그것>과 맞닿아 있으며, 다른 <그것>에 맞닿음으로써만 존재한다. 그러나 <너>라고 말하는 곳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아무 것과도 맞닿아 있지 않다." 따라서 <나-그것>의 시선은 <나-그것-그것>, <나-그것-그것-…>으로 이어진다. 이 한없이 인접하는 <그것>의 계열 속에 <나>도 <그것>의 <그것>이 된다. 이러할 때 시선의 도착이 일어난다. 모든 관음증, 노출증, 심지어 나르시시즘적 시선의 도착도 <나-그것>의 계열이다. 그러나 <너>는 대상도 광경도 아니다. <너>는 전부이다. <나-너>의 시선 속에 <너>는 세계의 전부이다. 그리하여 모든 <너>는 부버가 말하는 신적인 <영원한 너>의 옷자락이 된다. 이후 5장 시선의 수사학에서 살펴보겠지만 <너>와 <영원한 너>는 제유적 관계에 있다.
장자는 그의 수양론의 핵심으로써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좌망, 심재의 수양론 속에서 <나-너>의 시선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다름 아닌 동아시아 산수화 시선의 이념이 된다.
(1)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치고, 형체를 떠나고, 지식을 버리고 대통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고 한다. (…) 대통과 하나가 되면 좋고 싫음의 차별이 없어지고, 변하면 한 군데 집착하지 않게 된다.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대종사(大宗師)]
(2) 너는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통일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고, 나아가서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氣)로 듣도록 하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밖에서 들어온 것에 맞추어 알 뿐이지만, 기란 공허해서 무엇이나 다 받아들인다. 도는 오직 공허 속에 모인다. 이 공허가 곧 심재이다.
若一志, 无聽之以耳而聽之以心, 无聽之以心而聽之以氣! 耳止於聽, 心止於符. 氣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心齋也. [인간세(人間世)]
(1)에서 귀와 눈의 작용은 형체와 지식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버려야 만이 대통(大通)과 하나가 된다. 대통이란 일체의 존재를 관통하여 <나-너>의 관계 속에 서게 하는 도(道)의 작용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유용성에 따라 대상을 차별하는 시선이 사라지게 된다. 좌망이란 바로 유용성의 시선의 그물에 얽혀 있는 <나>를 비우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말한다. "세계의 몽상가들은 세계를 대상으로 바라다보지 않는다. <침투하는> 시선의 공격성은 그와 관계 없다."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가 "없음을 욕망하며", "능동적 수동성", "내면적 빔의 경험"을 말할 때 이는 좌망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상태를 파스는 무심(無心)이라고 하는데 "무심한 사람은 근대 세계를 부정"하게 된다. 근대의 세계는 시선-소유 위에 건축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2)의 심재 역시 좌망과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는 '듣는다'라는 청각 은유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총명(聰明)이나 이목(耳目)처럼 대체로 동아시아 고전의 문화에서 청각과 시각은 병칭 되고 있으며, 또한 마음의 기능을 말하는 '부(符)'는 현저히 시각 은유이다. 따라서 심재를 시각과 연결시켜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칸트식으로 말한다면 여기서 귀는 외부의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감성 작용이며 마음은 들어온 데이터를 틀에 맞추는 오성의 기능이다. 그러나 기는 칸트의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기는 주체도 객체도 아니며 안도 밖도 아니다. 그
것은 텅 빈 것이며 시선에 의해 나누어지는 주객의 분리가 사라진 자리이다.
소식(蘇軾)이 흠모해 마지않았던 문여가(文與可)는 대나무를 그리면 "멍하니 나를 잃고 대나무가 되었다[ 然遺其身, 其身與竹化]"고 했고 나대경(羅大經)은 풀벌레를 그리면서 "모르겠다. 내가 풀벌레가 된 건가? 풀벌레가 내가 된 건가?[不知我之爲草蟲耶, 草蟲之爲我耶?]"라고 했다. 석도(石濤)는 그의 일생동안의 창작 활동을 두 개의 단계로 나누었다. 하나는 "산천이 나에게서 태를 벗는[山川脫胎於予]"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산천에서 태를 벗는[予脫胎於山川]" 단계이다. "산천이 나에게서 태를 벗는" 단계에는 산천이라는 자연이 자아화 되는 것이다. 서양 미학의 개념으로는 감정이입이며, 동아시아 미학의 용법으로 하자면 자아의 감정의 시선으로 경물을 보는 '이아관물(以我觀物)'이다. "내가 산천에서 태를 벗는" 단계는 석도 자신의 말로는 "산천이 나와 더불어 정신으로 만나 자취로 화[山川與予神遇而跡化也]"하는 것이다. 이는 물아가 혼연일체를 이룬 주관과 객관이 동일화된 경지이며 자아가 경물의 기운과 우주의 운치 속에 녹아 들어가는 '이물관물(以物觀物)'이다. 이러한 혼연일체 속에는 나오는 것이 석도의 일획론(一 論)이다. 일획 속에 만획이 다 들어 있다. "일획은 뭇 있음의 뿌리요, 모든 이미지의 근본이다[一 者, 衆有之本, 萬象之根]." 문여가와 나대경, 그리고 석도의 경계는 심재의 기를 예술화한 경계에 들어서 있다. 기의 자리, 그것은 물아양망(物我兩忘)의 자리이며 시선의 인칭이 사라지는 자리이다.
<고사관록도>의 시선은 어느 순간 느닷없이 텅 빈 여백과 우리를 직면시키면서 우리를 시선의 인칭이 사라진 자리로 초대한다. 이 그림의 중심은 선비도 사슴도 산도 물도 아닌 바로 그 텅 빈 기의 자리, 여백인 것이다.
5. 시선의 수사학
수사학은 원래 변론술의 수단이다. 그러나 최근의 수사학의 논의들은 단순한 방법적•기교적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이제 하나의 세계 인식의 방법이 되었으며 미적 세계관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이 되었다. 시선에 수사학을 적용시켜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은 그의 중요한 논문인 [언어의 두 양상과 실어증의 두 유형]에서 언어 기호의 배합 양식을 결합과 선택으로 나누고 있다. 결합의 축은 인접성에 의해 형성되고, 선택의 축은 유사성에 의해 형성된다. 그가 결합의 축을 환유에, 선택의 축을 은유에 배당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는 은유적 유형으로 시•낭만주의•상징주의를 들고, 환유적 유형으로 소설•사실주의를 들고 있다. 인접성과 유사성이란 가장 일반적인 연상의 기본 성질이기 때문에 은유와 환유는 우리의 사유 패턴 전체를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자와 장자에게 나타나는 사유 패턴은 은유라고도 할 수 없고 환유라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은유이면서 동시에 환유이다. 우리는 이것을 제유라고 이름하고자 한다. 물론 야콥슨 자신은 제유를 디테일적인 것으로만 파악하여 환유의 한 형태로 보고 있다. 그러나 K. 버크는 부분(소우주)과 전체(대우주)가 서로를 반영하고 재현하는 사유형태를 '고상한 제유'라고 하여 환유로부터 분리하고 있다. 버크의 분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은유-재현적 ; 대상과 대상 ; 동일성 ; 형식주의
환유-환원적 ; 부분과 부분 ; 외재성 ; 기계론
제유-통합적 ; 대상과 전체 ; 내재성 ; 유기론
이러한 버크의 분류는 노장의 사유형태를 제유로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대체로 이 분류를 따를 작정이다. 시선의 수사학을 논하기 전에 노장의 사유 패턴과 제유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노장에 따르면 일체의 개별자들은 '스스로 그러하며[自然]' ,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타자에 의존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 속에서 개별자들은 서로 '안'으로 관계되지 못하고 다만 '밖'으로 환유적으로 인접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하나 하나의 개별자들은 또한 모두 도의 은유들이다. 왜냐하면 도는 없는 곳이 없고, 모든 것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환유적으로 흩어진 개별자들이 한 순간에 도라는 중심으로 통합된다. 그러나 이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도는 존재론적으로 '없음[無]'이며 '활동이 없는[無爲]' 활동이다. 따라서 도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없음'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신이라는 중심의 부재 속에서 출발한 근대는 코기토의 눈으로 그 부재를 메우려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코기토의 눈이 그 중심을 메우려하면 할수록 빈 중심의 무(無)는 더욱 어찌할 수 없는 구멍으로 드러날 뿐이다. 역으로 무가 뚜렷하게 현시되면 될수록 그 구멍을 메우려는 집착도 더욱 강박적이 된다. 코기토의 눈이 만들어내는 근대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분열과 긴장의 문맥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여기서 '무', '구멍'이라는 기표는 '실재계'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듯하다.
최근 데리다를 위시한 해체주의에서 강조하는 탈중심의 논리는 이러한 강박적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자 한다. 이러한 해체적 탈중심의 사유와 동아시아의 전통 사유 양식, 무엇보다도 노장사상과의 유사성은 꽤 주목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표피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 근원적인 차이가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해체주의의 탈중심이 '중심이 없음'이라면 노장의 사유에서는 중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없음이 중심'이 된다. 이 둘의 차이는 의외로 근원적이다. 중심이 다름 아닌 근대적 이데올로기, 혹은 권력일 때 중심의 해체는 탈근대의 유익한 징후일 수 있다. 중심의 해체는 중심을 통해 강요된 은유적인 동일성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개별자들은 자율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개별자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성의 긍정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개별자들은 동일한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아무런 내적 연관이 없이 그저 인접해 있는 환유들이다. 중심이 없이 떠도는 환유들은 끝없이 대체되는 욕망의 운동이기도 하다. 반면에 '없음이 중심'일 때 개별자는 '없음'을 통하여 전체와 통합된다. 그러나 이 중심은 차이성을 억압하고 동일성을 강요하는 실체적 권력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의 즉각적인 반영을 가능케 하는 구멍일 뿐이다. 이 무의 구멍을 통하여 부분으로서 개별자들은 차이성을 보존한 채 전체와 통합된다. 이것이 장자가 道란 어디에 한정된 것도 아니요 사물을 초월한 것도 아니라고 말할 때의 그 진정한 의미이며, 바로 제유의 양식이다. 이 노장의 제유는 산수화를 통해 가장 탁월하게 예술로 실현된다.
이제 시선의 수사학을 살펴보자. 시선에도 은유와 환유 그리고 제유가 있다. 우선 은유의 시선은 대체로 은폐되어 있지만 모든 시선들을 동일성에로 향하게 하고 그리하여 그것은 가능한한 공통된 시선의 중심, 끝내는 하나의 시점―즉 자신의 시선 아래 통합하려 한다. 원근법의 시선은 바로 이러한 은유의 패턴이다. 원근법은 하나의 눈을 시각적 세계의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하나의 눈의 초점을 향하여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시녀들>에서 비가시성 속에서 모든 시선을 수렴시키고, 거울을 통하여 가시성 속으로 나타나 모든 시선을 지배하고자 하는 왕과 왕비의 응시는 전형적인 은유의 시선이다.
위 그림은 라파엘로의 <마리아의 결혼>이다. 이 그림 속의 모든 사람과 경물들은 하나의 선을 공유하며 그 선을 향하여 집중되어져 있다. 그 하나의 선은 화면에 가로질러 둥근 돔의 건물의 열린 문에서 소실점을 이루는 시선이다.
원근법의 기본적인 원리는 대상을 보는 눈을 소실점에 맞추는 것이다. 라깡의 이론을 통해 시각체계와 원근법을 분석하고 있는 주은우는 소실점을 큰타자의 응시의 위치라고 본다. 원근법으로 세계를 보는 눈은 큰타자(혹은 이데올로기)의 응시에 자신의 눈을 일치시킴으로써 시각적 주체로 구성된다. <마리아의 결혼>에서 소실점의 자리인 건물의 문은 <시녀들>에서 거울과 동일하게 분명 그림 전체를 응시하고 있는 눈이다. 큰타자의 응시와 시선의 일치는 은유적 패턴이다. 그러나 큰타자의 응시에 자신의 눈을 일치시키는 은유의 시선은 자칫 응시의 힘을 자신이 차지하려 하면서 가시적 대상들을 얼어붙은 순간 속에 응시시키고 운동을 종결시켜,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소유하려는 '악한 눈'이 될 위험으로부터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시선의 힘을 라깡은 파시눔(fascinum)이라고 하였다.
라깡의 큰타자는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에 상응한다. 원근법의 시선은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서도 지속적으로 서구 근대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의 통사론이다. 이러한 시선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 입체파의 등장이다. 입체파는 대상을 해체하여 여러 각도에서 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입체파는 원근법의 단일 시점을 벗어난 다시점의 형상을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입체파의 시선은 환유적이다. 야콥슨 역시 입체파에서 대상을 일련의 부분으로 변형시키는 명백한 환유 지향성을 읽는다. 입체파는 자연의 여러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하고자 하였던 세잔의 기획 속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입체파의 그림에는 전체가 없다. 그 곳에는 부분만이 있다. 부분을 이루는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만이 있다. 이는 전형적인 근대 과학의 환원주의 전략과 상응한다. 회화는 이미지를 다룬다. 이미지는 다른 무엇보다 분할할 수 없는 전체였다. 이러한 이미지의 특성이 근대 전 사유 패턴을 지배한 환원주의 물결의 범람 속에서도 그나마 서양 회화를 방어해 왔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입체파의 등장과 더불어 환원주의는 기필코 회화까지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환유적 환원주의의 입체파는 또한 시선-소유의 한 극단을 이룬다. 그것은 시선으로부터 옆면 뒷면에 은폐되어져 있는 것을 도면의 전개도처럼 한 평면에 펼쳐서 시선 속에 소유하는 것이다. 입체파는 시선의 해체, 시선의 주체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상을 해체하여 소유하는 것이다.
입체파 이전에 환유의 시선을 보여주는 예로는 파노라마적 지각이 있다. 파노라마는 달리는 철도의 차창을 통해 풍경을 보는 것에서 기원한다. 연속되는 풍경들은 부분으로 나누어진 채 인접성으로 연결된다. 철도로 대표되는 19세기 사회의 기계화과정이란 자연의 소실이나 살아있는 신체와 연결된 공간지각의 상실로써 체험되고 있다. 그리하여 파노라마적 지각이란 인간을 지금까지 자신이 속해 있던 풍경에서 분리시켜서, 보는 것을 극장화하고 영화화해 버리게 된다. 파노라마 또한 시선-소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푸코로 하여금 우리의 사회가 감시의 사회라고 외치게 만들었던, 벤담에 의해서 구상된 원형교도소인 판옵티콘은 다름 아닌 파노라마적 시선 구조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환유의 시선과 동아시아 산수화의 산점투시(散點透視)는 일견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사유 패턴 속에 이루어지는 시선이다. 산점투시는 삼원법을 제시한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산은 가까이서 보면 이와 같고 몇 리 떨어져 보면 또 이와 같으며 십여 리 떨어져 보면 또 이와 같아 매번 멀어질수록 매번 다르니, 이른바 산의 모습은 걸음걸음마다 바뀐다는 것이다. 산은 정면에서 보면 이와 같고 측면에서 보면 또 이와 같으며 뒷면에서 보면 또 이와 같아 매번 볼 때마다 다르니, 이른바 산의 모습은 면면마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입체파의 다시점이 분석적인 것이고 파노라마가 신체적 움직임의 차단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걸음걸음 보고 면면마다 보는 산점투시는 산을 소요하는 자의 체험적인 시선이다. 산점투시는 대상을 부분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설리반은 이를 '이동하는 시점'이라고 명명하고 서양 미술에서는 현대에 이르도록 이루어 본 적이 없는, 공간적인 요소에 시간적인 요소를 결합한 4차원적인 종합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이동하는 시점, 이를 위해서 주체, 즉 시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름이어야 한다. 이는 풍경도 이를 보는 주체도 모두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흐르고 있는 기(氣)라는 사실이 전제된다. 그러할 때 산점투시는 환유적이기보다는 제유적이다. 흘러가는 다시점은 일기(一氣)라는 총체성 속에 이루어지는 역동성의 표현이다.
제유의 시선은 동아시아 산수화 특유의 여백에서 이미지화 된다. 곽희는 산이 높은 느낌이 들게 하고 물이 먼 느낌이 들게 하는 것에 대해 논하면서 투시법에 의해서만 공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산을 높게 하고자 하면 산을 다 드러내서는 높게 되지 않으며, 안개와 아지랑이로 산허리를 가려야만 높아진다. 물을 멀게 하고자 하면 물을 다 드러내서는 멀게 되지 않으며, 가리고 비쳐서 그 물결을 끊어야만 멀게 된다.
여백은 일반적으로 안개와 아지랑이, 혹은 구름의 이미지다. 이러한 것들은 우선 공간을 더욱 광활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무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넘나들며 그 접면을 이루기 때문이다. 설리반은 산수화의 여백은 감상자로 하여금 상상 속에서 이미지를 완결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그에 따르면 완결이라는 개념은 중국인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들의 산수화는 최종적인 상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종료된 것이 아니라 문을 여는 것이다. 세계는 완결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고 무궁한 변화 속에 있다. 산수화란 그러한 무궁한 변화 속으로의 문이다. 그리하여 산수화는 시선의 끝이며 의경(意境), 혹은 깨달음의 시작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여백이다.
여백은 제유다. 석도는 산수화의 구도에서 땅(근경), 수목(중경), 산(원경)을 나누고 그 사이에 구름이나 안개(여백)를 두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삼자를 따로 놀게 하지 않고 "한 기운[一氣]으로 관통시키는 것[先要貫通一氣]"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림 5의 <설색운산도>는 이러한 점을 잘 실현하고 있다. 여기서 봉우리들을 휘어감고 있는 구름(혹은 안개)의 띠는 우리의 시선을 분할하면서(환유) 통시에 통합한다(은유). 그것은 일체가 모두 기의 흐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사관록도>에서 A→B→D→E의 라인으로 이어지는 부분들의 인접과 A→E의 즉각적인 전체성이라는 두 가지 시선은 여백 E를 통하여 가능하게 되고 통합된다. 그리하여 부분과 전체가 무궁한 변화 속에서 서로를 표현하게 된다.
6. 시선을 넘어서
여백은 무이다. 그것은 모든 시선의 인칭들이 사라지는 자리이며, 상징계에 난 구멍이다. 이 구멍을 통해 실재계가 현현한다. 근대 서구 문화는 이 "미완의 생명을 지닌 듯 천천히 흐르는 회색빛 무정형의 안개"같은 실재계에 대해서 지나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이 건설한 이 인공의 사회적 현실은 실재의 침입으로 인해 언제든지 찢길 수 있는 취약한 상징적 그물망에 지나지 않음을 걱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광기의 징후와는 거리가 먼, 실재계를 현실에서 분리하는 경계는 바로 최소한의 정상상태의 조건이다. 광기(정신병)는 이 경계선이 무너져 내릴 때, 실재계가 현실 속으로 넘쳐흐를 때, 혹은 실재계가 그 자체로 현실 속에 포함될 때 시작"된다고 그들은 염려한다. 그러나 장자는 이 실재계와의 만남이 광기를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자유인 소요의 시작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산수화는, 그 산수화의 여백은 바로 그 노장적 소요의 이미지이다.
여백은 시선-소유의 반복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리이다. 이 시선-소유는 서구 근대 문명의 통사론이다. 서구 근대 문명이 문제가 있다면, 그리하여 그것의 극복이 요청되어진다면 우리는 우선 이 시선-소유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어두운 상자 속에 대상을 구겨 넣을 것이 아니라 드넓은 자연 속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타자들이 도구나 소유의 대상인 <그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맞이해야 할 <너>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 자신까지도.
그리하여 여백은 제유의 미학이다. 그것은 자칫 전체주의적 동일성의 강요로 이어질 수 있는 은유의 시선도 아니요, 차이성으로 중심 없이 떠도는 욕망의 환유도 아니다. 차이성의 긍정 위에서 이루어지는 동일성이다. 차이성의 부분들과 동일성의 전체가 무궁하게 일어나는 상호 표현이다. 그 속에서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만나고, '이미지[象]'와 '이미지를 넘어선 이미지[象外之象]'가 어울려 춤이 된다. 약동하는 기의 춤. 생명의 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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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23:21:18, Hit : 2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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