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접예술론 신생 제3호에서
무의 미학(상)
―음악, 그림, 글씨 그리고 춤의 동양적 심미관
정세근
-나는 {신생}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역시 문화의 중심지는 서울만이 아니었다. 그저 시학 잡지라기에,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신생}은 달랐다. '신생'(新生)의 의미처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다. 몰락하는 중국을 보며 전통 경전에 반기를 든 노신의 잡지 {신생}도 생각이 나고, 풀 한 포기에 깨달음을 얻은 {타는 목마름으로} 사는 김지하가 떠오르기도 했다. 신생은 두 가지의 축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는,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요, 다음은, 그에 따른 생태론적 대안이었다. 시는 그 가운데 있었다. 하나의 다리로, 하나의 실로, 하나의 바람으로 그 곳에 있었다. {신생}이 보여주는 길은 분명했다. 논문들도 하나같이 좇는 바가 있었다. 중국은 {신청년}(新靑年)으로 혁명을 이루었지만, 우리는 부산의 {신생}으로 다시 태어난다.
역시, 환경론은 풀뿌리 민주주의이며 지방자치에 속한다. 중앙집권이 가져다준 폐해가 곧 환경파괴였다. 거대한 공룡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큰 공장과 넓은 쓰레기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예쁜 다람쥐에게는 결코 원자력 발전소나 매립장이 요구되지 않는다. 따라서 풀뿌리(glass-roots)는 시골이며, 농사며, 민중을 가리킨다. 우리는 대구의 {녹색평론}을 통해 이미 지방분권의 위력을 경험한 바 있지 않은가? 또한, 결국, 환경론은 우리가 면접해 있는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수반한다. 근대 곧 현대의 핵은 이성이지만, 이성은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이성은 곧 권력이었다. 자본주의의 합리성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 봉사하는 애틋한 처지를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본주의의 본령인 프랑크푸르트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어떤 철학자들도 함부로 이성을 비판하지는 못했다. 기껏해야, 마르쿠제(Marcuse)처럼 이성의 도구성을 비판하거나 하버마스(Habermas)처럼 이성으로 가다듬어질 수 있는 대화의 진작(振作)이었다. 그런 점에서 탈이성의 문제는 오늘을 수용적이 아닌 변혁적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거기에 주광잠(朱光潛)이니 이택후(李澤厚)를 덧붙인다는 것은 고의는 아니지만 실례에 속한다. [그림의 상상, 글씨의 전통]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했지만, 나는 잡지를 받아보고 과감히 필향(筆向)을 바꿨다. 솔직한 나의 고백이, 편집진에게 훨씬 값어치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가 고백이듯, 나의 글도 그래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요즘의 나의 화두인 '없음'―無를 말하고자 한다. 과연 무란 무엇인가? 있을 만한 것인가, 아니면 정말 없는 것인가? 왜 있음이 아니고 없음인가? 그것은 왜 오늘날 이야기돼야 하는가? 나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음과 없음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인접예술론이라는 광역주제는 무척이나 부담스럽다. 인접예술론의 '음악'과 '화론'이 이미 연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나의 역할은 아마도 '서론'(書論)인 듯하다. 노래, 그림, 글씨, 그리고 춤의 순서인 셈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따진다면 시와 인접예술론은 아마도 몇 회 안에 종결돼야 할는지도 모른다. 인접예술로 가능한 것은, 그 이외에는 연극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예술의 큰 장르는, 안타깝게도, 이처럼 음악, 미술, 무용, 연극에 그친다. 그리고는 문학이다. 따라서 나는 이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모든 예술적 분류의 가장 큰 배경으로서 미학적 차원에서 '없음'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이를 배경으로 하는 예술은 동양의 것이다. 그리고는, 음악에서의 없음, 미술에서의 없음, 서예에서의 없음, 무용에서의 없음, 끝으로 문학과 가장 닮은 연극에서의 없음을 매우 개괄적이고 조잡하게 다루고자 한다. 이것이 가장 편집의도에 접근한다고 자위하면서, 아니, 원고 청탁자가 말끝에 서예론에 계속 여지를 두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임을 깨달으면서.
마지막으로, 여기서 나는 개론적이다. 그렇게 넓고자 하는 까닭은, 첫째, 문학을 하는 사람 앞에서 철학을 요리조리 들춰주는 것도 재미는 있겠지만 너무도 그 둘의 거리를 멀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고, 둘째,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의 이름과 논저들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 지성의 지평을 맞추어 나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지식의 유희나 교환은 자본주의의 순한 양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궁극적으로는 독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동지를 바라는 것이다. 독자는 글을 읽지만 동지는 글을 삼킨다.-
1. 없음을 찾아서
없음의 문제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없는 것을 말하자니 어렵다. 그래서 없음은 논리학으로 '논증'되기보다는 심미적으로 '감응'되며, 머리로 '인식'되기보다는 몸으로 '파악'된다. 우리는 논리학과 미학의 근원을 잘 안다. 논리학은 이성의 인식론이고, 미학은 감성의 인식론이다. 이 때, 발상은 감성의 인식론이 이성의 인식론보다 처진다는 뜻에서 비롯한다. 미학(Aesthetica)의 시작은 이처럼 처량했다. 근대 미학의 아버지인 바움가르텐(Baumgarten)은 이렇듯 열등한 인식론의 탄생을 주도했다.
서구 사상에서 왜 이성은 감성보다 우월한가? 그것은 철저히 있음의 세계를 없음의 세계보다 높게 보는 사유로부터 근거된 것이다. 있는 것은 말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서구의 인식론에서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희랍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원칙은 마치 교리처럼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독단에 가까운 이 주장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너무나도 당연히 받아들이는 이 논증들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나의 생각으로는, 그 뒤에 바로 이성이 있었다. 이른바 '이성적인 사유'는 없는 것에 대해서는 감히 덤벼들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있음은 어떻게 있고, 없음은 어떻게 없는가? 그것의 출발은 실로 표피적이다. 보이는 것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눈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없다. 적어도 내 앞에 보였던 것은 있음의 영역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철저히 없다. 서구 사상이 목을 메고 있었던 것은, 서구인 자신들도 긍정할 수밖에 없듯이, 바로 '현존성'이었다. 데리다(Derrida)와 같은 후기현대의 사상가들이 그러한 현존성의 비판에 심혈을 기울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 서구인들은 그것에 매달렸는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이성은 말이다. 이성은 말로 드러나고, 말없는 이성은 벌써 이성이 아니다. 그래서 서구의 사변이라 함은 말을 함이요, 말로 형식화되지 않는 사변은 없다. 대표적인 예가 '논리학'과 '변증법'이다.
논리학은 말의 원리(logic)이다. 말을 잘 함은 말이 조리(條理)를 갖춘다는 것이고, 조리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보편적이며, 나아가 선천적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가 고집스럽게 찾으려고 했던 것은 너 다르고 나 다른 주장이 아니라 나와 네가 함께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다시 말해, 이 인류 최초의 합의라고 할 수 있는 '보편자'였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평생을 바쳐 추구해온 보편자였다. 때로는 '무엇이 그것이냐'―'이것이 정의'라고 하지 않고 '정의가 무엇인가'하고 물어졌고, 때로는 저 멀리의 '온전한 생각'(idea)으로 그려졌고, 때로는 만물에 내재하여 있는 '고유한 틀'(form)이라 불려지며, 그 모두 형식(eidos)이나 본질(ousia)과 관련을 맺어왔다. 이데아의 세계를 만들어낸 플라톤(Platon)은 그렇지 않은 것을 모두 억견(臆見: doxa)으로 간주하였고, 본질의 잠재성(energeia: potentiality)을 강조하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eteles)는 그 씨앗이 커나가 열매를 맺는 과정에 집중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꿈 많은 이상주의자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꿈나무를 심는 자연학자였다. 플라톤에게는 이미 이루어진 그림이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씨앗만이 있었다. 플라톤은 그림을 통해 제도사(製圖士)처럼 현실을 구획하여 나누어볼 수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씨앗을 통해 열매를 볼 수 있었다. 설계도도 없이 건물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이며, 씨앗은 곧 열매의 정수 아닌가? 그런데, 이 삼총사는 모두 말이라는 도구와 무기를 철저히 신봉했다. 비록 말의 폭력에 희생된 소크라테스이지만 그는 그래도 말로 대항했고, 소설가적 기질이 농후한 플라톤은 이상국을 말로 그려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잠재성이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완성도에 관심을 가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예 논리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삼았다. 말, 그것은 그들의 창이자 방패였다.
변증법은 말 그대로 대화법(Dialectics)이다. A와 B의 대화, 그러나 A와 B의 의견은 같지 않고 말다툼을 벌린다. 그러다 보니 A와 B를 넘어선 C가 탄생된다. 이것이 변증법의 골자이다. 변증법은 한마디로 대화의 과정이며 수단인데, 그것을 말뿐만 아니라 삶에로 적용시킨 결과이다. A와 B라는 사람의 주고받는 이야기는 이제 역사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견하게 된 것이다. 헤겔(Hegel)이 인류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이러한 방법을 대입한 이후, 마르크스(Marx)는 관념적인 태도가 아닌 경제적인 태도에 이를 적용하기도 하면서, 변증법은 우리의 현실 이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그 이해는 다름 아닌 '이 세계는 말로 되어있음'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말은 말로 끝장을 볼 수 있다는 태도를 공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말로 되어있는 세계란 무엇인가? 이성의 제국이다.
그러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세계란 무엇인가? 감성의 왕국이다. 멋진 풍경을 보고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한다. 너무도 기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한다. 이 둘 모두 말을 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과 거리를 두려 애쓴다. 언어의 형용성에 상당한 부족을 느끼는 것이다. 이 세계는 반드시 말로 표현돼야 하는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이성과는 일정 거리를 벌리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일은 반드시 논리적이지는 않다. '비록 논리적이진 않아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거나 '앞뒤가 맞지는 않지만, 그것을 볼 때 슬프면서도 기쁘다'는 감정은 논리 이상의 설득력을 갖기도 하는 것이다. 콰인(Quine)이 선택한 유행가 가사처럼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From a logical point of view. 1953) 아름다운 여인은 못생긴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논리적 세계는 충실하다. 충직한 견공처럼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주인의 말을 잘 따르지만, 그 이외의 일은 잘 하지 못한다. 논리의 주인은 이성이며, 이성의 명령은 논리의 체계를 갖춘다. 이성은 사람을 이해하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람을 총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정치를 할 때 감정이란 무엇인가? 정적(政敵)은 논리적 싸움만의 결과인가? 아니리라. 3류 영화의 복수전처럼 정치도 감정적이다. 작게는 보복에서, 크게는 선동까지, 그것이 현대정치의 모습인 것이다. 인간사가 정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듯,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고, 그에 따라 감정의 개입을 철저히 부정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거나, 같은 말이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왜 남의 감정은 생각지 못하는가'라거나 '옳은 말이라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솔직하지 않을까? 말로는 이성을 이야기하면서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기보다는 합리성의 원칙 아래 상당 부분을 감정의 변화나 추이에 할애하는 것이 과연 소심하고 비겁한 일일까?
로고스(logos)는 말이요, 참이요, 길이다. 말은 참을 낳고, 참은 길을 낳는다. 말의 길은 참이요, 참한 말은 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로고스를 믿고 따르며, 때문에 참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삼자의 조화와 협조는 너무 배타적이었다. 말을 버리고 참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무(無)는 말없음이요, 참을 넘어섬이요, 길을 없앰이다. 말은 참에 얽매이고, 얽매인 참은 새로운 길을 내지 못한다. 말은 길이 아니라 길 밖까지도 말해야 했다. 따라서 말 같은 말도 말이요, 말 같지 않은 말도 말이다. 인명학(因明學)은 불교의 논리학이지만, 공안(公案) 또는 화두(話頭)는 선종의 탈논리다. 동양의 성현들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못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없이 참을 얻고, 참 없이 길을 얻는다. 말은 참과 만나 길을 열지만, 길은 말과 참을 버리라 한다. 그 길이 도(道)이다.
2. 동양의 논리
동양의 논리는 있다. 그렇다면 서양의 논리가 있고, 동양의 논리가 따로 있는가? 물론, 따로 있다. 논리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동서를 넘어서 한 길을 갈 듯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서양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동일률(the principle of identity)을 결코 떠날 수 없지만, 동양에서는 자기정체성으로부터의 탈리야말로 '참다운 인식'의 첫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나다'라는 동일률이나 변형된 동일률인 '나는 나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모순율은 서양에서는 논리학의 입구에 시작되지만, 동양에서는 '나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깨닫지 못하는 한 동양적 진리를 결코 맛볼 수 없다.
거칠게 말해, 동양에서의 나는 나이면서도 너일 수 있는 상관적 개념이다. 첫째, 나는 나이지만 나를 만들어준 부모와 형제, 그리고 내가 만들어낸 아이들까지 미친다. 그래서 동양의 인간은 '관계'(關係)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 나는 나이면서도 내 속의 나 아닌 것이 있어 나를 나답게도 하고 나를 나답지 않게도 만든다. 나는 차가운 물이지만, 내 속에는 뜨거운 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동양의 인간은 그 둘의 '조화'(調和) 속에 있다. 셋째,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수많은 나를 버티고 있는 고을과 나라가 있어야 했으니, 나는 벌써 나의 책임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나는 권리 속에 있지 않고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속에 살지 않고 '당위'(當爲)로 산다. 동양에서 정의된 이러한 '관계적 인간', '조화적 인간' 그리고 '당위적 인간'은 각 학파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이러한 문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동양의 논리에서 나는, 한마디로 말해, 나만이 아니다. 나는 너요, 나는 물이자 불이며, 나는 나이면서도 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핏줄을 거쳐 나로 태어나고, 나는 남을 만남으로써 내가 되며, 나는 이러한 나이지만 저래야 하는 나이기도 하다. 나의 정체성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에게 있다. 따라서 나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다. 나의 차가움은 아버지나 물로부터 얻은 것이요, 나의 따뜻함은 어머니나 불로부터 얻은 것이다. 나는 때로 아버지나 물에 가까울 수도 있고, 나는 때로 어머니나 불에 다가갈 수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물과 불은 다르지만 언제나 내 속에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태극과 시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태극은 하나이지만, 태극은 둘로 그려져 있다. 둘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바로 태극이다. 말을 바꿔보자. 나는 하나지만, 나는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게 바로 나다. 태극은 그 속에 많은 이질적이거나 대립적인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동양 우주론의 모형이 된다. 그 우주는 만물을 포함하며, 만물은 인간을 포함한다. 두 상반되는 것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태극이라는 한 마당에서 벌어진다. 사람도 나와 나 아닌 것의 사랑과 다툼이 한 자리에서 벌어진다. 이렇듯 나는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태극의 운동은 시간이란 큰 흐름 속에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반복한다. 태극 자체는 '마당'이라는 공간적 개념이지만, 그것의 운동은 '흐름'이라는 시간적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시간이 고착화된다면 나는 나이지만, 나였으며 나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유동에 초점을 맞춘다면 나는 나이지만, 내가 아니었을 수도 있으며 내가 아닐 수도 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는 시간의 처음과 끝을 정하지 않는 한, 의미 있는 질문일 수 없다. 기승전결은 기와 결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기승전결의 부단한 순환을 가리킨다. 사람은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수양(修養)을 통해 선의 화신(化身)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공이 많을 수도 있지만, 성찰(省察)의 부족으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서 동양에서 사람을 말할 때, 반드시 '공부'(工夫)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수양도 공부요, 성찰도 공부다. 공부는 책을 보는 일일 수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을 보는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이러한 논리구조에서만이 이해가 가능하다. 색은 색이지만 공이며, 공은 공이지만 색이다. 색과 공은 언제나 뒤바뀔 수 있으며, 색 속에는 공이 있고 공 속에는 색이 있다. 색이 있기에 공이 있는 것이며, 공이 있기에 색이 있는 것이다. 현상은 본질이요, 본질은 현상이다. 현상 없는 본질 없고, 본질 없는 현상 없다.
다시 말한다. 나는 나이지만 너이고, 너는 너이지만 나이다. 나와 너는 언제나 뒤바뀔 수 있으며, 내 속에는 네가 있고 네 속에는 내가 있다. 내가 있기에 네가 있는 것이며, 네가 있기에 내가 있는 것이다. 자기는 타인이요, 타인은 자기다. 자기 없는 타인 없고, 타인 없는 자기 없다.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논리'란 너무도 그 기반이 박약하다. 서양논리학은 그 외곬의 길을 걸어왔다. 동양의 논리학은 이러한 통합의 논리학에 치중하다 보니 변변한 논리학 책 하나 만들지 못했다. 논리라는 말이 서양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민감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논리라는 말과 멀어지거나 떨어질 까닭은 없다. 적어도 사유의 방식이나 체계가 '태극론적 사고'에 충실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논리, 좀 더 정확히는, '태극논리'(太極論理)라는 말을 자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동양의 논리, 한마디로, 그것은 태극논리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제인 없음(無)의 자리는 어디인가? 태극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자. 이 태극을 그리는 방식은 거의 일정하다. 다시 말해, 태극의 대체적인 모습은 형식상 같으나, 어느 자리에 무엇을 대입시키냐에 따라 학파와 주장이 내용상 달라진다. 이를테면, 태극의 위와 아래 부분 가운데 어느 곳에도 물과 불을 넣을 수는 있지만, 그 전체의 모습을 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불로 볼 것인지에 따라 입장이 상당히 달라진다는 말이다. 만일 물과 불의 움직임을 물로 본다면, 그는 이 사회를 비교적 차갑게 보려는 것으로 진보보다는 보수를 원할 것이다. 만일 물과 불의 움직임을 불로 본다면, 그는 이 사회를 비교적 뜨겁게 보려는 것으로 개혁보다는 혁명을 원할 것이다. 최후의 선택에 따라 차가운 철학과 뜨거운 철학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물의 철학자와 불의 철학자는 이렇게 나누어진다.
마찬가지로, 없음은 있음과 없음의 밖에 있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상반된 요소의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는 태극, 그 자체는 없음이다. 있음의 철학자는 거꾸로 말할 것이다. 있음은 있음과 없음의 밖이 아닌 안의 것으로, 그 자체는 있음이라고. 노자(老子)가 태극을 없음으로 보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는데 반해, 그보다 십 여 세기 이후의 주자(朱子)는 태극을 있음으로 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경주한다. 노자가 태극을 없음으로 보려는 것은 바로 '무극'(無極)에 자기철학의 종국이 가 있기 때문이며, 주자가 '무극과 태극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다'(無極而太極)라고 외친 것은 그의 철학은 유학(儒學)으로 결코 도가(道家)류의 무극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자에게는 무가 있었지만, 주자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유학의 관심인 이 현실세계를 긍정하지 않는 무리로 비춰졌기 때문에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그의 선성(先聖)에 의해 전제된 '무극은 태극'이라는 명제를 유의 영역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 주자는 필생의 작업을 벌인다. 그에 따르면, 무극은 태극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독자의 권역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논지는 있음과 없음의 밖이 없음임을 분명히 한다.
고래(古來)로 동양의 논리는 12세기의 주자 한 개인의 설득으로 쉽게 탈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자는 이 세계를 얻었지만, 이 세계 밖을 버렸다. 노자가 동양에 던져준 없음의 세계를 유학의 명분 아래 방기했다.
동양의 예술론은 바로 그 좋은 증거들이다. 동양의 예술론은 무 없이는 말할 수 없다. 무가 전제되지 않은 예술은 예술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인위는 인위의 끝에서 무위가 되듯, 예술은 예술의 끝에서 무화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낱 기교에 그치고 만다. 예술에서도 도(道)와 기(技)가 나누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위대한 장인(匠人)은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무에게로 나가서 무와 함께 된다. 성인이 무를 말하지 않은 것은, 노자를 주석한 왕필(王弼)의 말처럼, '(공자는) 무를 몸으로 삼았기'(體無) 때문이라 하지 않던가?
3. 형위와 무위
무위(無爲)는 노자철학의 실천강령이다. '아무 것도 하지 마라.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된다.' 이러한 역설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 노자의 무위 사상이다. 무위를 소개하면서 '실천강령'이라 함은 분명 모순에 속하지만, 그것은 분명 실천의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실천학의 범주에 속한다. 도(道)는 진리론적인 이론학이지만, 도와 더불어 이야기되는 덕(德)은 '어떻게 살 것인가' 또는 '어떤 삶이 좋은가'에 대한 대답으로 일정한 실천을 선택 내지 권고하고 있다. 이렇게 '도'와 '덕'은 떨어질 수 없는 한 짝으로 이루어진다. 그 실천의 중심부에 무위가 자리 잡고 있다.
무위는 무위로 그치지 않는다. 무위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이다. 이른바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의 원칙은 노자 이후 행위를 강조하는 모든 사람의 난제 중의 난제였다. 이것을 해도 안되고 저것을 해도 안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돼야 했다. 가장 좋은 완성은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옳으냐 말이다. 아무리 행위의 가치를 확신했던 맹자(孟子)도 송(宋) 나라 바보 이야기를 하면서 '잘 자라라고 풀을 위로 조금씩 올려주는 짓'을 경계해야 했다.
무엇이 무위인가? 내가 밥을 먹는 것은 무위인가? 그렇다. 내가 배가 고파 밥을 먹는 것은 무위이다. 그렇지 않다. 내가 배가 부른데도 밥을 먹는 것은 무위가 아니다. 내가 노는 것은 무위인가? 그렇다. 내가 배가 불러 나무 아래 서성이는 것은 무위이다. 그렇지 않다. 내가 나무를 잘라 돈을 벌려는 것은 무위가 아니다. 그렇다면 아픈 데 약을 먹는 것은 무위인가, 아닌가? 어디까지가 무위인가? 벌에 쏘인 데 된장까지인가, 감기에 아스피린까지인가, 신장병에 장기이식까지인가, 아니면 불치병에 유전자조작까지인가?
무위를 알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형위'(刑爲)이다. 형위는 행위와 다르다. 행위는 매우 적극적으로 의식이 개입된 인간의 동작을 가리킨다. 행동은 반드시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동물 전반의 활동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행위와 다르다. 인간은 행위하지만 동물은 행위하지 못하며, 인간과 동물은 모두 행동한다. 그런데 나의 어법상 형위는 이보다 상위의 것으로 언어를 가진 인간의 모든 규범적 행위를 가리킨다.
'형명'(刑名 또는形名)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름과 '형'(刑이나 形)이 쉽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꼴'(形)을 말할 때는 '이름'과 꼴의 합치라는 점에서 그런 대로 이해가 되지만, '칼'(刑)과 '이름'은 쉽게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문자에서 그 둘은 서로 통했다. 그러나 형명의 원의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칼'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칼은 나눈다. 두부를 칼로 나누듯,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위와 아래를 자를 수 있다. 사람들은 두부의 모양은 칼 때문에 네모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부는 동그랗게 만들 수도 있고 세모꼴로 자를 수도 있다. 두부가 네모나게 된 것은 칼의 덕(德)이다. 칼이 없었으면 두부가 오늘의 모양으로 존속할 수 없다. 형(刑)은 그런 점에서 규범(規範)이며 법칙(法則)이다. 규범이나 법칙 모두 칼의 이미지와 멀어질 수 없는 '자르는 것'이다. 너와 나는 이렇게 나뉘어지며, 나와 너는 모두 이렇게 한 틀 속에 있다. 두부는 틀 속에서 그렇게 만들어졌으며, 그렇게 잘려졌다. 떡은 떡판에서 그렇게 만들어졌으며, 그렇게 자기의 모양을 갖는다. 하나는 '두부틀'이고 다른 하나는 '떡 판'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이름은 결국 나를 칼질하는 근거이고 이유인 셈이다. 그래서 칼과 이름은 한 자리에 있다.
형위는 '칼과 이름을 만나게 해주는 모든 짓'을 뜻한다. 열심히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읽어 관직을 얻어 행정을 하는 것도 형위이며, 잘못한 죄인을 형벌로 단죄하는 것도 형위이다. 앞의 것이 비교적 문야한 형위라면, 뒤의 것이 비교적 잔혹한 형위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 그 둘이 다른 것은 아니다. 통치라는 상자에 맞추는 행위, 그 방법이 이념이든 형틀이든 상관없이 밖으로 나온 것을 자르고 안의 것을 채우는 행위, 그것이 바로 형위인 것이다.
형위는 순자(荀子)처럼 제도[禮]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오기도 하고, 상앙(商 )처럼 왕권의 강화[變法]로 표출되기도 하고, 한비자(韓非子)처럼 채찍과 당근[賞罰]이라는 수단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두 '행위의 완수'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형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크릴(Creel)의 말처럼 법가는 '법률가'(legalist)뿐만 아니라 '행정가'(administrator)의 의미를 갖는다. 무엇인가 집행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자들이 바로 법가인 것이다. 나의 의미에서, 법가는 곧 '수행가'(performer)로 그는 사업의 성취를 가장 큰 목적으로 삼는다. 수행되기 위해서, 그것이 재주 부리기이던 꼴불견의 짓이던 상관하지 않는다. 작업이 잘 거행될 수 있고, 성능이 효과적일 수만 있으면 된다. 이른바 퍼포먼스(performance)는 인기를 끌어 흥행에 성공하기 위한 연극이요 연주 행위이다. 그런 점은 근대 정치의 마키아벨리(Machiavelli)와 가장 닮았다. 그들을 마치 진시황의 권력에 빌붙어 난도질하는 이들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 중의 오해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적 작업은 어떤 영역에 속하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무위이지만, 예술가는 무엇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위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형위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함으로써 무엇인가 이룬다. 그러나 그 형위가 행정적인 임무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위라 하기도 곤란하다. 예술적 행위는 과연 무엇인가?
공예와 미니멀리즘, 그리고 행위예술을 예로 들어보자.
이른바 '공예'(工藝)라는 개념은 사실상 한 일본의 미학자에 의해 특별한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다. 그가 바로 '광화문을 헐지 말자'고 일제에 호소했던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悅)이다. 그는 예술은 예술이되 개인의 이름이 분명하지 않고 익명성을 전제한 예술로서의 '공예'({工藝文化}, 1942)를 주창한다. 그는 공예를 수공예(手工藝)와 기계공예(機械工藝)로 나누었으며, 수공예에 바로 '민중적 예술'(民衆的工藝)을 입적시켰다. 오늘날 '민예'(民藝)라는 말은 민중적 예술의 준말로 이름 없는 예술가의 예술품이라는 뜻을 지닌다. 민예를 사랑했던 그는 작자 없는 예술로 공예를 개념화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늘날 공예라는 말은 예술의 하부개념으로 자주 쓰인다. 왜냐하면 예술은 작자의 이름이 있지만, 공예는 작자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 설령 이름이 있더라도, 기교와 상술에 근접하는 그것을 공예라는 말로 폄하하기도 한다. 만일 그것이 용인될 수 있다면, 예술은 이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정의대로라면, '이름 없는 예술가'는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낙관이 없는 초상화나 서명 없는 서양화처럼.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예술은 '이름'을 고집한다. 바로 그 이름 때문에 형위의 본디 뜻인 형명에 일정 부분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국보가 대부분 작자의 이름이 없는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보여준 작태에 세계는 놀랐다. 뒤상이 좌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건은 최소주의, 즉 현실의 물건에 어떤 것도 가감하지 않겠다는 의식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예술은 무위와 닮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좌변기에는 '좌변기'라는 고유의 이름이 있었지만, 예술가는 '샘'이라는 색다른 이름을 붙인다. 텔레비전을 다름대로 모아놓고 '(바벨)탑' 또는 '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백남준도 미니멀 아트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2000년을 앞두고 송승환이 흥행에 성공한 '난타'(亂打)는 악기의 영역을 주방의 물품으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또한 모더니즘(modernism)의 한 부류이다. 비록 이름은 있지만 이름이 특별한 위계질서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름과는 일정한 거리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무위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음으로써 엄청난 행위의 영역으로 전환한다. 고대 형명가(刑名家)들이 벌인 변법(變法)은, 현대의 예술가들에 의해 '변명'(變名)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행위예술은 우리의 시선을 끄는 데 주목한다. 도무지 현대인은 자기의 일에 바빠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은 기이하기 짝이 없다. 퍼포먼스의 우리말은 해괴(駭怪)하고 망측(罔測)한 짓에 해당한다. 적어도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집중시키면 된다. 그리고는 아무런 책임을 지려들지 않는다. 느끼란다. 또는 싫어하란다. 그것이 그들의 목적이란다. 때로는 줄거리를 통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기발함과 특이함이 우선된다. 그래서 행위예술은 형위에는 충실하고, 무위와는 자못 거리가 멀다. 촌로(村老)를 찍은 사진은 무위에 해당하지만, 촌로를 발가벗긴 춤은 형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무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의 형제인 무위에 가까워지는 것이 동양예술의 궁극적인 지향처이다. 형위는 상자에 따라 사람을 난도질하고 위와 아래를 구별한다. 그러나 무위는 그저 그렇게 뿌옇게 있어 어디가 눈이고 코이고 입이고 귀인지 잘 모른다. 민예의 원의인 이름 없는 '민중예술'이 의미 있고, 기둥의 정형화된 장식에서 벗어나 기물(器物) 그대로의 '바우하우스'다운 창작물이 가치 있고, 남성기를 잘라야 하는 고음(castrato)에서 비교적 저음 위주의 팝송(country music)이 호소력이 있는 까닭은, 사람이 형위를 싫어하고 무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무위에로 나가는 것은, 배고픈 내가 밥을 먹는 것과 같다. 배부른 돼지에게 한 술 밥을 더 먹이는 예술은 무를 결코 만나지 못한다. 형위는 정치가의 것이고, 무위는 예술가의 것이다. 모여라, 없음의 무리들아. (계속)
인접예술론 신생 제4호에서
무의 미학(중)
―예술의 동양적 심미관
정세근
5. 예술은 무위인가?
예술이 일부러 꾸미는 형위(刑爲: {신생}2, [무의 미학(상)])를 지양하고 무위를 이상으로 삼는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예술은 무엇인가를 벌이고 있지 않느냐고, 그것이 만드는 것이든 부수는 것이든 일정한 행위를 하고 있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기본적으로 무위가 될 수 없고, 작위(作爲)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하려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작위의 목적에 있다.
예술은 칸트(Kant) 이래, 무이익성(無利益性: ohne Interesse/ disinterested)이 그 특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특별한 목적 없이 벌어지는 일이 곧 예술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 용어가 일본식 무관심성(無關心性)으로 번역되었던 것은 진정 오역에 가깝다. 왜냐하면, 예술적 행위도 기본적으로 일정한 관심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심미활동의 이유이다. 그가 어떤 활동을 하면서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한다면, 그것은 심미활동이 아니라고 간파한 사람이 바로 칸트이다. 이를테면, 오늘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해서라든가, 그런 예는 지나치더라도,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든가 일정한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심미 태도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 바로 칸트이다. 그의 미적 원리는 곧 무이해관계성에서 출발한다.
사실, 이러한 무이해관계성의 태도는 동양에서 훨씬 빠르게 강조되었다. 장자의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장자는 한마디로 '쓸모 없는 것의 쓰임'(無用之用)의 철학자로 정의된다. 도가사상가들이 늘 '없음'(無)을 강조하지만, 이 없음의 층차도 매 철학자마다 다른데, 특히 장자는 없음의 이론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현실에 적용시킨다.
쓸모 있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건이나 물건이 어떤 맥락 속에서 가치있고 의미있음을 가리킨다. 배가 고픈데 밥이 있으면 밥은 배고픈 사람에게 쓸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밥이 그 자체로 쓸모를 갖는가? 아닐 것이다. 벼는 결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키고 있지 않다. 인류의 반의 식량을 대주고 있는 벼는 쌀이 열리는 풀일 뿐이다. 산에서도 자라지만 물 속에서도 잘 자라는 일년생 식물이다. 사람은 그 벼를 자신의 생존도구로 삼았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쓸모 있다는 것은 철저히 인간적 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길조(吉鳥)라거나, 해충(害蟲)이라거나, 잡초(雜草)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인간적 기준에서 내리는 호오(好惡) 판단일 뿐이다. 새는 하늘을 날아다닐 뿐인데, 사람들은 어떤 새는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고 어떤 새는 액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문화에 따라 길조와 흉조가 뒤바뀌기도 한다. 이를테면, 박쥐의 이미지가 중국에서는 복(福: 편'복' ' '으로 '복'의 발음과 같다)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고, 독일인에게 귀뚜라미는 가을의 낭만과는 무관하다. 모기가 해충이라지만 모기는 자신의 생존원칙에 충실할 뿐이고, 지렁이가 익충이라지만 지렁이도 열심히 종족을 보존할 뿐이다. 벼와 피의 구별은, 사람이 많은 쌀을 얻고자 하는데 까닭이 있는 것이지, 하늘이 벼와 피에게 순잡(純雜)의 혈통을 내려준 것은 아니다.
개가 사람을 따르기 때문에 우리는 개를 사람의 벗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에게 어떤 악명을 붙여주었을지도 모른다. 노래는 즐겁지만 사람에게만 즐거울 수도 있고, 어떤 노래는 어떤 사람에게만 즐거울 수도 있다. 좋은 사람끼리 살을 맞대는 것은 너무도 좋은 일이지만, 싫은 사람끼리 살을 맞대는 것은 너무도 싫은 일이다.
술은 좋은 물건이지만 잘못 쓰면 가장 나쁜 물건이 된다.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예수가 대속(代贖)한 상징으로 예식에서 쓰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될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따라서 술은 호오가 극단적으로 내재한다. 술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쓰임에 따라 가치가 너무도 달라지는 것이다. 마치 칼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것과 같다. 칼은 늘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지만, 때로는 살인의 도구로, 때로는 수술의 도구로 쓰인다.
쓰임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가치망에 들어옴을 가리킨다. 사람에게 쓰이거나 사람에게 버림받는다. 내가 훌륭한 것은 나 그 자체가 훌륭한 것이 아니다. 내가 훌륭한 것은 나의 그것이 남에게 쓸모가 있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다. 내가 남보다 힘이 세다면 사람들은 힘 센 나를 쓰고자 할 것이고, 내가 남보다 머리가 좋다면 사람들은 좋은 내 머리를 쓰고자 할 것이다. 훈장이란 그 쓰임에 충실했음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이다. 나라의 쓰임에 몸바쳤다는 증거이다.
{장자}에는 지리소(支離疎)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름 그대로 몸이 갈라지고 끊어지고 떨어진 불구이다. 턱은 배꼽에, 어깨는 정수리에, 장기는 위쪽에, 허벅지는 갈비뼈에 있고 머리는 하늘로 치솟지만, 그는 행복하다. 바느질이나 빨랫감으로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키질이라도 해주면 열 식구도 먹일 수 있었다. 더욱이 전시나 사역에는 불구이기 때문에 전장에 끌려나가지 않아도 되고, 평화시에는 불구라고 지원을 받아 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대로를 활보하면 의기양양하게 다닌다. 장정(壯丁)이라고 잡혀갈 일도 없고, 호구(糊口)를 위해 목숨걸 일도 없다. 그는 그러한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몸을 기르고 하늘이 준 목숨을 다하는 데 족하다'(足以養其身, 終其天年. [德充符]).
{장자}의 애태타(哀 陀)라는 인물은 동정심이 절로 가는 인물이다. 생김새는 불쌍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고, 하는 짓은 모두 넘어질 듯하다. 말 그대로 '못생긴 사람'(惡人) 곧 추남이다. 그럼에도 여인네들은 남의 처가 되길 마다하고 그의 첩이 되려 부모에게 안달이다. 나라를 맡기려 해도 도망간다. 인기지리무순( 支離無脣)은 한 몸에 절름발이에 곱추에 언청이를 갖춘 사람이며, 옹앙대영(甕 大 )은 항아리 목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덕이 높은 사람으로 장자는 그리고 있다.
이처럼 장자는 성인(聖人)을 거의 모두 불구로 그리고 있다. 멀쩡한 사람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일탈하지 못한다. 그는 벌써 그 관계망 속에서 쓸모의 관점에서 파악되어 있다. 그러나 불구는 그러한 쓸모의 관계망으로부터 제외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불구의 사회로부터의 소외는 장자에게 오히려 거꾸로 비춰진다. 불구만이 사회의 규정적인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장자는 '쓸모 없는 것의 쓰임'의 주장에 다다른다. 나아가, 쓸모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쓸모 있다고 생각한다.
장자의 이러한 맥락은 매우 심미적이다. 그래서 후대 철학사가들은 장자를 미학의 비조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徐復觀, {中國藝術精神}, 1966/ 鄭世根, [莊子美學在詮釋上的問題淺議], 1988) 장자가 말하는 '쓸모 없는 것의 쓰임'은 진정 예술의 특징과 너무 닮았다. 예술은 일상의 규정에 결코 함몰되지 않는다. 예술감상이란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먹고사는 것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땅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내 두 발이 닿고 있는 그만큼의 땅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서있지 않은 그 너른 땅 때문인가? 장자의 답은 간단하다. '그래, 서있기 위해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땅을 천길 낭떠러지로 파버린다면, 우리가 어떻게 서있을 수 있겠는가?' 예술은 바로 내 두 발 바깥의 땅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무용(無用)성에 기반한다. 효용, 가치, 역할, 능력, 기능의 극대화를 격렬하게 반대하고, 무효용, 무가치, 무역할, 무능력, 무기능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예술의 가치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후자의 영역에 가깝지만, 우리는 그들을 이 세계로부터 퇴출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배우며 느끼며 뒤돌아본다. 예술은 그런 역량을 지닌다.
예술이 무위라 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거나 그저 쓸모 없는 것으로 쉽게 단정지어서는 안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무동작, 심지어 무기력이 아니다. 무위는 유위의 관계망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수양이자 단계인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노자의 선언은 작위와의 결별선언이다. 그 철학적 입론으로는 이름에서의 벗어남, 곧 공자의 정명(正名)론을 힐난하는 '무명'(無名)론이 자리한다. 이름이란 사회적 관계의 설정을 대변하는 것이고, 이름을 없앰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 및 도피를 뜻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이름 값을 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고, 그러나 때로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이름에서 떠나고 싶어한다. 장자는 노자에다 또 하나의 표준을 덧붙였다. '쓸모 없는 것이야말로 쓸모 있다'는 탈가치의 제기로 장자의 철학은 인간사유의 새로운 영역-심미적 태도를 마련했다. 서양인들이 근대에 들어서야 무이익성을 심미의 표준으로 삼은 데에 비해, 동양인은 너무도 일찍부터 삶의 가치를 확인했던 셈이다. 그 확인은 동양인들의 사고 속에는 늘 감성의 영역이 마련되어야 함을 공조케 했다. 그 미학 곧 감성학이 바로 '논리적 논증에서 심미적 감응으로', '머리의 인식에서 몸의 파악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4. 노래
예술은 없음의 무리를 좇는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없음의 무리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노래이다. 왜냐하면, 노래는 불러지면 사라진다는 점에서, 가장 무위에 가까우며 형위와 멀기 때문이다. 노래는 전통적으로 일회적이었다. 연주의 행위는 한 번을 위해서 벌어졌고, 감상의 행위도 한 번만이 주어졌다. 따라서 흔적이 없다.
노래는 그것의 무위적 성질 때문인지, 가장 사람의 삶을 담고 있다.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노래가 있다. 문화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부터 문화의 중심지라 자부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노래는 인류 생활의 일부분이다. 콧노래부터 오페라까지 노래라는 큰 범주는 온갖 인간사를 포괄한다. 노동요에서 제례악까지, 지하가요에서 국가까지 노래는 세계의 보편언어이자 문명의 공통언어이다.
그런데 노래에 귀천과 고하가 있는가? 노래에 늘 상하 이데올로기가 개입한 것은 사실이다. 고대음악에서 극히 난잡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정성(鄭聲)>은 초창기의 흑인음악인 랩에 대한 우리의 거부감과 비슷한 이유로 경원시 되었다. 정과 위(衛) 지역에서 유행하던 이 노래에 대한 거부감은 공자({論語}, [陽貨])와 순자({荀子}, [樂論])를 위시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 [本生])와 {예기}(禮記, [樂記])에 여실히 실려있다. 대체로 음탕하며 세상을 어지럽힌다(亂世)는 이유로 폄하된 이 음악은 <아악(雅樂)>에 대비되고 있었다. 마치 오늘날 유행가가 고전음악을 능가할 때, 고전음악가들이 주장하는 클래식의 팝에 대한 우위와 비슷하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음악이 처음부터 정음(正音)의 지위를 누린 것은 아니다. {시경(詩經)}의 노래를 공자는 300편 모두가 '어긋남이 없다'(思無邪)라고 했지만, 시경은 사실상 주대(周代)의 가요이며, 그 가운데에는 때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때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는 흉폭하고 잔인하게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아무리 은유로 포장되었다하지만, 나름대로 극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경}이 궁중제례의 음악도 있었지만 민간속악뿐만 아니라 여인의 음악(<房中樂>)도 있었다는 사실은 고전의 성립이라는 것은 고저급의 이분법(二分法)이 아닌 고저급의 '망라법(網羅法)'으로부터 출발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노래에서 고급과 저급은 어떻게 발생되는가? 재미있게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옛것'과 '새것'이라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정성, 또는 정위지음(鄭衛之音)은 곧 신악(新樂) 또는 금악(今樂)이었고, 전통음악은 고악(古樂)이었다({史記}, [樂書]). 유행음악에 대한 전통음악가들의 저항은 오늘날도 그렇지만, 역사적으로도 분명한 것이었다. 속악(俗樂)은 현재의 것이고, 아악(雅樂)은 전통의 것이다. 공자와 맹자에게 정과 위에서 유행하던 그 노래에 '악'이라는 호칭을 붙여주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악'은 곧 아악이고 그 밖의 것은 그저 소리[聲]일 뿐이라고 여겼을 정도로 강력한 반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잠깐 유행할 노래도 있고, 영원히 우리의 심금을 울릴 노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고전(古典)이란 좋은 것이며, 고전음악이란 나름의 위상을 갖는다. 그러나 문제는 고저급이라는 판준이 결코 고정적이지는 않다는 데 있다. 창작을 하지 않겠다(述而不作)는 공자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수구, 복고적이었기에 정성을 미워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정의 노래를 들으면서 싫증을 느끼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흡인력 있는 음악성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맹자도 '오늘의 노래는 옛날의 노래와 같다(또는 옛날의 노래로부터 나온다)'(今之樂猶由古之樂也. {孟子}, [梁惠王]下)면서 전통의 노래[先王之樂]가 아닌 오늘의 노래[世俗之樂]를 인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노래가 공연이 강조되는 현대예술의 하나임을 잘 안다. 음악회(concert)는 때로는 열린 공간에서, 때로는 작은 공간에서 수없이 벌어지며, 많은 대중을 흡인한다. 노래는 고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온 예술인 것이다. 오늘날 노래에서 더 이상 고저급의 판준은 의미가 없다. 나는 이러한 고저급의 해체현상이 곧 노래의 기본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는 계급을 부정한다. 노래는 맹자가 말했듯이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만 있다(與民同樂)면, 좋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과 사람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異)이 예(禮)라면, '하나로 만드는 것'(同)이 악(樂)인 것이다({禮記}, [樂記]).
여기서 노래가 말하는 없음의 무리를 찾는다. 노래는 하나되기(一)를 좇는다. 하나가 되기 위해 노래는 많은 것을 없앤다. 계층의 구별을 없애기, 신분의 차이를 없애기, 남녀의 차별을 없애기, 노소의 격차를 없애기 등 노래는 예술에서 '무화'(無化)의 선봉(先鋒)이다. 뱃노래에서 광복가까지 인간세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아리랑 아래 우리가 뭉칠 수 있는 것은 노래를 통해 한겨레의 세계 속에서의 절대독립과 민족 안에서의 절대평등을 감수(感受)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에서의 '민중'은 '노래'로 뭉쳐진 동질 집단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동양적 음악체계의 인식이다. 서양의 음악이 무와 거리를 두고 있는 반면, 동양은 음악을 통해 무를 체인(體認)코자 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음악은 악학(樂學)과 율악(律學)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악학은 비교적 단순한 음악 입문학이라면, 율악은 그것을 기초로 여러 가지 체계와 변화에 대한 고급음악학이다. 악학에서는 기초적인 기보법와 독보법을 학습하고, 율학에서는 현률(絃律)과 관률(管律)의 체계를 비롯하여 12률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응용(京房의 60률과 그에 근거한 360률 등과 같은 변형)을 시도한다. 나아가 음률과 천체의 역법(曆法)을 한 데 묶어 이야기하는 율력(律曆)학도 후자에 속한다.
이른바 율려(律呂)란 12률의 다른 이름으로, 6률과 6려를 합쳐 이르는 말이다. 6률은 기본 음가이기 때문에 '양률'(陽律)이라고도 불리며, 6려는 6률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육간'(六間) 또는 '음려'(陰呂)라고 불리기도 한다. 6려는 여종(呂鐘)이 세 번 반복되기 때문에 '육동'(六同)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음률의 개체단위는 대체로 5성(宮商角徵羽)을 벗어나지 않는다. 변치(變徵)와 변궁(變宮)과 같은 변음이 끼어 들어가면 7률도 가능해지고, 궁성과 상성 사이에 응조(應調)가 들어가면 8음도 가능해진다. 사실상 5성은 소리내는 꼴에 따라 정해진 것으로, 궁상각치우는 목(喉), 네모난 이(齒), 뾰족한 이(牙), 혀(舌), 입술(脣)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아주 거칠게 말해, 현대 8음계의 도레미솔라를 궁상각치우라는 발음으로 낼 때 주로 울리는 기관을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화성학(和聲學)의 정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노래는 어떠한가? 완전히 서양의 8음계에만 빠져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의 모든 음을 옥타브체계에 꿰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아마도,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강조는 서양이 동양을 결코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음악의 경전이 최고경전인 '6경'의 하나에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노래에 대한 동양인의 배려를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서구적 전통은 아니다. 대학은 보편학으로서 이성의 학문을 전수하는 곳이지 감성의 숙련을 쌓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체육이 대학의 학문으로 되어있는 것도 서양인들이 쉽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양에서 말하는 예(藝)란 철저히 인문교양의 영역에서 삶을 온전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교양'의 의미에 가장 적실한 것이 바로 예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학을 이성의 전투장으로 만들어 놓기에 바쁘다. 뿐만 아니라, 예체능이 오히려 대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성은 무의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 이성은 무를 위주로 하는 예술과, 무위를 이상으로 하는 음악을 포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동양적 음계의 등장이 우리를 좀 더 없음의 자리에로 탁송해 주길 희망한다. 서양의 그레고리안 찬트가 5음계이면서도 우리의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을 북돋아주는 것은 8음계만이 정답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노래는 하나되기의 목소리라는 점에서 상하 이데올로기는 없을수록 좋다. 노래를 통해 평등을 얻음은 노래의 무화적 성격이다. 동락(同樂)의 '같음'(同)은 '다름'(異)의 '있음'(有)을 '없애는 것'(無)이다. 노래에서 '같음'은 '없음'으로 이해된다(同, 無也). 노래를 통해 '같지 않음이 있음'(有所不同)은 '같지 않음이 없음'(無所不同)으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악에 대한 강조(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는 의미심장하지만, 음악의 정사(正邪)론은 토론의 여지가 있다.
아울러, 율려론은 단순한 음악론이 아니고 우주론이며 세계관이라는 점에서-{예기}, [월령(月令)]에서 12률은 12월과 마주하며, 특히 {주역}의 전문가인 경방의 60률은 율력동일(律曆同一)론에 기초한다- 동양인의 음악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음률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천문지리적인 일이라는 점에서 매우 공적인 영역에로 확대되고, 그런 특징은 악률이 단순히 인간의 호오만을 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원리로 적용됨을 보여준다. 이 때 율려는 소유[有]되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계가 보여주고 있는 무의지[無]의 영원한 유행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나아가, 중국을 대표하는 음악가이자 죽림칠현 가운데 하나인 혜강( 康)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광릉산(廣陵散)>을 연주했는데, 그는 노래에 슬픔과 기쁨이 본디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슬픔과 기쁨으로 실린다({聲無哀樂論})고 주장했다. 소리에 매달리지 않고 사람을 만났다는 점에서 혜강은 대표적인 무의 음악가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득 찬 노래가 아니라 나의 비어있는 마음[無心]이 어디로 가느냐에 달려있었다.
5. 그림
우리가 그림에서 무를 느끼기는 쉽다. 어렸을 적 그림은 여백이 없이 꽉 채워야 한다는 가르침 속에서 나는 매우 갸우뚱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그림 가운데 상당수는 너무도 많은 빈자리를 그냥 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동서의 극명한 차이를 각인시켜 주었고, 물음은 늘 '채움과 비어둠의 다름은 어디에서 나왔을까?'로 집약되었다. 철이 들면서, 나는 두 가지 재미있는 차이를 발견했다. 서양은 늘 빛이 그림을 간섭하는데 동양은 철저히 빛을 생략했다는 것과 풍경(風景)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경(心景)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빛을 개입시킨 동양화(조선말의 강세황, 청말의 <群馬圖>)를 볼 때, 서양화의 느낌을 곧바로 얻을 수 있다. 만일 사물의 특징을 그리지 않고 제도법에 따라 원근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동양화의 느낌은 곧 사라지고 만다. 데생에 철저한 학도가 산수화를 그런 방식으로 그리면 결과적으로 한단지보(邯鄲之步)가 되고 만다. 산수화에 익숙한 문인이 도시를 그려내면 영 사실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가? 한마디로 말해, 서양의 그림은 '유일성'이 전제되어 있고, 동양의 그림은 '다수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굳이 서구 신학의 유일론을 거론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 문명 속에서 빛의 유일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곧 진리의 거부와도 직결되었으리라는 상상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빛은 서양미술의 핵이다. 빛은 지혜이자 신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빛을 무엇보다도 중시했다. 이를테면, 렘브란트의 위대함은 빛의 마술에 있었다. 또 현대의 인상파나 후기 인상파가 빛의 인상을 과장하거나 점묘화하는 것은 그들의 빛에 대한 맹목적이다 싶은 관심에게 기인한다. 빛으로부터 떠나 빛으로 모이는 그림이 바로 서양화인 것이다. 서양화의 철저한 원근법은 바로 빛이라는 중심에 충실하게 그릴 때 당연스럽게 도출되는 사물의 모습이다. 그러나 동양인에게 빛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중심이 없었기 때문에 빛뿐만 아니라 사람의 시각도 다원화되었다. 한 그림 속에는 원경과 근경은 물론, 아래에서 본 것도 있고 위에서 본 것도 있다. 그리고 작자는 그림을 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아예 그 속의 인물에다 자신의 심경을 싣는다. 관찰자가 없으니 화면은 자연히 다차원적이 되고 만다. 어떤 산수화를 막론하고, 서구적 원근법에 맞게 그려진 그림은 없다. 가려진 풍경은 풀어서 늘어뜨린다. 작자는 화중인물에 시각을 맡겨 아래부터 천천히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송대의 범관(范寬)의 <계산행려도(谿山行旅圖)>나 곽희(郭熙)의 <조춘도(早春圖)>에서 작자들은 똑같이 산의 허리를 감춤으로써 산의 높이를 올리는데, 그런 것이야말로 그림의 묘미를 극대화시켜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James Cahill).
동서양의 미술은 이처럼 출발부터 엄격하게 달랐다. 서양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면 됐지만, 동양은 그리고 싶은 것은 오히려 숨겨야 했다. 이른바 달을 그리고 싶으면 구름을 그려야 했던 것(烘雲拓月)이다. 꽃을 그리고 싶어도 말발굽에 나비를 그려야 했다. 유를 그리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무를 활용해야 했다. 백지란 필묵을 위한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살려주는 가장 의미 있는 여백으로, 유를 낳는 무[有生於無]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산수(山水)보다는 작자의 마음이 더욱 중요했다(王維: 凡畵山水, 意在筆先. {山水論}). 나아가 붓이 지녀야 할 것은 힘줄(筋), 살(肉), 뼈(骨)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氣)이었으며, 보이는 병보다도 보이지 않는 병이 더욱 중했다(荊浩, {筆法記}). 우리는 기(氣)가 동양회화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거듭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른바 인물화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칙이 바로 '기운이 살아있을 것'('氣韻生動' 謝赫) 아니던가?
그런데 그 기를 마치 유물론적인 시각에서 물질의 하나로 이해한다면 너무도 오독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 기는 한대의 우주론자들에 의해 우주에 꽉 찬 어떤 것[元氣]으로 설명되면서 물질화의 첫걸음을 내딛고, 송명시대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리(理)와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바람에 순수함이 퇴보되고, 청대의 기론자들에 의해 세(勢)와 더불어 이해되어 역사적 의미를 띠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기는 오늘날의 물질과는 상당한 거리를 지니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기는 보이지 않고, 가장 순수한 물질[精]과 가장 순수한 정신[神]을 이어준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무한한 동력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기는 무의 부류에 속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의 모이고 흩어짐이 만물의 생사를 정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환원되지만 영원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에 가깝다. 그리고 그 없음은 빔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빔[太虛]이다. 송초의 이학자는 태허는 기로 가득 찼기 때문에 무는 없다고 주장했지만(張載, {正蒙}), 그것이 곧 없음의 전부일 수는 없다. 유는 유로 한정되어야 유이다. 그런데 태허는 결코 유로 한정되지 않고 무한하다. 그런 점에서 무한은 무의 영역으로 돌려져야 하는 것이다.
그림에서 무를 찾고자 함은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먼저 얼굴이 아니라 눈에서 정신-눈빛[眼神]이 느껴질 것, 의경(意境)을 그릴 것, 완숙도[能]나 기묘함[妙]보다는 정신성[神: 張懷瓘]을 우선시 할 것, 나아가 그런 품차(品差)조차 떠날 수 있을 것[逸: 朱景玄] 등이다. {장자}에서 송나라 원군은 그림을 그리라니까 옷을 홀랑 벗은 화가[史]를 '진짜 화가'(眞畵者, [田子方])라고 부르지 않던가?
아마도 그림에서만큼 유가가 마음을 열고 없음의 무리를 받아준 적은 없었던 듯하다. 그것은 유학의 형이상학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심미적 세계가 요청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이인문이 산수를 그릴 때도 '강산무진'(<江山無盡圖>: 44.0×856.6cm, 국립중앙박물관)을 강조했어야 하듯, 무의 접촉이야말로 예술적 출발이었던 것이다. 주자가 벌려놓은 무극과 태극의 동일성 문제에서 문인화가들이 비록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림에서만큼은 무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었다.
석도(石濤)는 중국의 화론에서는 독보적인 지위를 지닌다. 명말청초에 시국의 비운으로 출가한 문인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후대 역사 속에서 화가로 이름을 남긴 이들(漸江, 殘)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석도는 가장 나이가 어리고 출가할 때도 열 살 전후라서 자아의식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후에 그가 남긴 화론은 화가들의 애독서가 되었다. 그의 화론은 옛날 옛적에는 법이 없었으며(太古無法), 바로 그 없었던 법이 처음의 법을 낳았고 그 처음의 법이 모든 법을 꿰뚫는다(蓋以無法生有法, 以有法貫衆法也. {畵語錄})는 말로 시작된다. 석도는 무법(無法)이 유법(有法)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유법은 중법(衆法)에 일관되게 적용된다는 주장으로 무의 지위를 천명하고 있다. 불법(佛法)의 시작은 무의 인식으로부터이듯, 화론도 무와 관련하여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인물로 우리는 팔대산인(八大山人)으로 더 잘 알려진 주탑(朱 )이라는 위대한 중국의 화가를 기억한다. 명 나라가 망하면서 승려의 길을 갔던 그는 너무도 절제된 필묵으로 모든 사물의 특징을 잘 그려냈다. 그의 새 그림은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극도의 간명성을 지닌다(<山石小鳥>: 136×48.7cm/ 161.8×42.2cm, <鳥荷圖>: 94.1×28.4cm, 그리고 <書畵冊>의 三과 四의 새 그림: 24.4×23cm, 上海博物館). 매화라 할지라도 몇 획 되지 않는 붓으로 천고(千古)의 세월을 담아낸다(<梅花圖>: 32.4×25.7cm, 南京博物館). 그가 그만큼 먹과 붓을 아낄 수 있었던 것은 정신 속에서 선가(禪家)의 무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묵을 써야하는 예술에서 '먹을 아끼는 것'(省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거듭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계속)
무의 미학(하) 신생 제5호에서
―예술의 동양적 심미관
정세근
7. 글씨
글씨는 동양적 예술체계이다. 서양에서 글씨[書]는 전통적으로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에 가까웠다. 서양에서 예술(art)의 의미는 비록 이러한 기예(技藝)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양의 정신세계 속에서 기술(technic)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붓글씨였다. 그런 점에서 붓글씨는 서양적 개념에서의 제도(製圖: draft)와 매우 다르다. 동양의 붓글씨를 번역하기 위해 손쉽게 찾는 말이 '예쁜 글씨'(calligraphy)지만, 그것은 '달필'(達筆)의 뜻에 가깝지 명필(名筆)과는 거리가 멀다. 때로 붓글씨는 예쁘기만 한 것(calli-)이 아니라 못생겨 보이기도(caco-) 한다. 붓글씨는 필사(筆寫)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완성을 기도한다는 점에서 동양만의 전통을 지닌다. 붓글씨는 우리는 서예(書藝),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라는 말로 불린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왕희지(王羲之)와 같은 명필로 알려진 인물에 대한 평가이다. 흔히 왕희지하면 천하제일의 명필로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인물로 평가하지만, 그에 대한 폄하도 엄연히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론이 제기된 것은 청나라의 완원(阮元)으로부터이다. 완원은 절강순무(浙江巡撫)였던 시절에 고경정사(古經精舍)를 창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적찬고}(經籍纂 ) 108권을 편찬했으며 경학의 이상적 판본인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와 {황청경해}(皇淸經解: {學海堂經解})를 정리해 낸 대학자이다. 그러한 그가 서예계를 뒤흔들만한 이론을 제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이라는 짧은 글이다.
내용은 중국서법의 전통은 남파와 북파로 나누어지고 남파는 첩(帖)을 북파는 비(碑)를 근원으로 했는데, 첩이란 종이에 자주 베끼다보니 원형을 잃고 비는 단 한 번의 모각(模刻)만을 거치니 원형을 지니며, 따라서 비를 원형으로 삼는 북파야말로 진정으로 과거의 서법전통을 잇고 있는 훌륭한 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포세신(包世臣, {藝舟雙楫}), 강유위(康有爲: {廣藝舟雙楫})와 같은 서예이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강유위에 따르면, 왕희지는 결코 서예를 배우는 사람의 모범이 될 수 없다. 왕희지의 첩은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그의 글씨가 훌륭한 점이 있다면 북파의 맥을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나라 이후의 첩은 버리면 버릴수록 좋고, 진정으로 모범으로 삼아야 할 시대는 바로 북위(北魏)의 비이다. 북위의 글씨는 한대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어, 예쁘지는 않을지라도 힘이 있고 정형화되지 않아 자유분방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맥락에 따르면, 과거시험용으로 이른바 송설체(松雪體)라고 불리는 조맹부(趙孟 )의 글씨는 형식적이고 규격적이어서 가장 멀리할 서체가 되고 만다.
이는 하나의 문화운동이었다. 글씨가 미려해지면서 나약해지는 것에 반발한, 새로운 전통의 발굴과 그 전파에 목적을 둔 지식인들의 운동이었다. 추사 김정희가 24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와서 그 당시의 이러한 문화적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옹방강(翁方綱)을 접하고 자신도 이러한 운동을 조선에서 전개하고자 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추사체는 외형상으로는 옹방강의 글씨와 적지 않게 닮았다. 김정희가 자신의 호를 완당(阮堂)이라 한 것은 바로 완원(阮元)에 대한 추존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본 {완당집}에는 바로 완원의 {남북서파론}의 일정부분이 그대로 실려있기도 하다.
김정희가 우리 나라에서도 바로 그러한 비학(碑學)의 전통을 살려보고자 했던 것이 바로 한국 금석학(金石學: 신라비 등)의 탐구였다. 그는 당시 선진국의 문화계가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를 보았고 우리도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가까운 전통의 부정이며, 오래된 전통의 긍정이었다.
서예계가 왕희지 이래 첩학의 전통을 오늘날까지 이어온 것은 그 발전의 역사에서 수치스러울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서예도 전통의 지나친 유화(有化)―규격화, 형식화, 격식화, 서열화, 계보화―가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하지 못했고, 마침내 청나라에 와서야 가까운 과거의 무화(無化)를 통해 새로운 전통을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만일 서예가 '아름다운 글씨'에만 매달렸다면, 나는 서예를 무의 예술의 범위에서 제외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서예는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힘있는 글씨'를 추종한다. 힘이란 손쉽게 수량화되지 않는다. 1마력, 2마력이라는 '말의 힘'이 말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과 같으며, 같은 말이라도 그 때의 역량에 따라 다르다. 그것이 기(氣)로 표현될 때는 더욱 계량화를 거부한다. 정신의 기운을 말하는 '신기'(神氣)라든가, 생명력의 활달함을 표현하는 '생기'(生氣)라든가 하는 것들은 아름다움을 넘어있는 '삶'의 문제이다. 글씨는 사람이 쓰고 사람은 그 속에 삶을 담기 때문에 서예의 기준이 '힘참'[氣滿: 包世臣]으로 설명될 수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우리에게 때로 아직도 반(反)왕희지의 기치가 어색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예의 본령이 무를 통해 기를 잡으려 함을 깨닫지 못해서이다. 여기에서 무란 형위로서의 가식이 아니라 무위로서의 자연이며, 형식에서의 타성(惰性)이 아니라 내용으로서의 본성(本性)이며,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라 힘의 표출인 것이다. 이 무는 단계적으로 무화를 유도하며 종국적으로는 힘에게로 이른다. 모든 운동의 기본이 힘을 빼는 것이듯, 서예도 그러한 무화를 연습하지 않는 한, 영원한 작위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제주도에서 9년 동안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서 귀양살이[圍離安置]를 해야 했던 김정희는 참으로 어렵게 그러한 부정의 운동에 참가했다. 부정은 이른바 전통이라 불리는 것의 무화(無化)였다. 그리고는 새로운 힘의 역사를 창조했다.
오늘날의 서예란 드로잉(drawing)의 시대에 쓸모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글씨가 무엇인지 모르는 데에서 나온다. 글씨 속에 사람을 담고, 마음을 담고, 느낌을 담는다. 그것은 활자(活字)가 해줄 수 없는 필획(筆劃)의 맛이다. 유의 체계로 서예를 보는 한, 서예는 드로잉의 초보적 단계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무의 체계로 나가야, 다시 말해, 아름다움이나 정연함을 버리고 사람의 힘을 담을 때야말로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글씨를 무화의 체계로 보는 것이다.
신영복의 한글 글씨가 절간을 비롯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가? 그는 오히려 전통서단에서 멀어져 있어 쉽게 무화를 이룰 수 있었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사색의 힘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8. 춤
분재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공통적으로 한 가지 까닭을 댄다. 분재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너무도 인공적이라는 것이다. 휘지 않을 곳을 휘게 만들고, 자라나야 하는 곳을 자르고, 마침내는 기괴한 형태로 불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이 불만이다. 분재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와는 반대의 생각을 갖는다. 자연이란 인공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이며, 세월을 내버려두지 않고 다듬음으로써 작은 화분 안에 몇 백년의 시간을 담을 수 있는 것이라고 반론한다.
동양과 서양의 춤을 볼 때마다, 나는 분재와 같은 극단의 입장을 만난다. 서양의 춤을 대표하는 발레는 분재와 같다. 서지 않는 발가락을 곧추세워 수직선을 만들고, 벌어지지 않는 다리를 벌려 수평선을 만든다. 그리고 수직과 수평 속에서 회전과 같은 매우 많은 원을 그림으로써 기하학적인 심미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동양의 춤은 기본적으로 자연스런 춤동작을 원형으로 삼는다. 기이한 동작이나 행위는 기예(技藝)나 곡예(曲藝)에 속하는 것이지 인간의 정서를 순화하는 무(舞)가 아니다. 무(舞)는 기본적으로 정(靜)적이다. 그리고 정(靜)은 무(無)의 한 모습이다.
사실상 '무용'(舞踊)이란 전통적인 춤인 '무'와 서구적 의미에서 춤인 '용'이 합해진 용어이다. 이른바 '무도회'(舞蹈會)라는 것도 팔짝팔짝 뛰는 행위를 강조하는 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적인 '무'와 동적인 '용'과 '도'는 개념상 엄격히 구별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무란 손동작이요, 도란 발동작인 것이다({禮記}, [樂記]: 手之舞之, 足之蹈之).
동양의 춤은 손이, 서양의 춤은 발이 우선된다. 손이 강조되면 발은 손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요, 발이 강조되면 손은 발의 부수적인 부분이 된다. 한마디로, 동양의 춤이 손을 펴기 위해 발을 움직인다면, 서양의 춤은 발을 펴기 위해 손이 움직인다.
무(舞)라는 글자는 무(無)자와 닮았다. 그 문자적 연원에서의 상관성은 그 갑골문에서 동일한 형태를 지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사람이 두 팔을 쫙 펴고 두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춤이란 자기를 움추리는 것이 아니라 펴는 몸짓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움켜잡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벌리고 내놓는 몸짓이다. 축적의 동작이 아니라, 개방의 동작이다. 유가 아니라 무를 지향한다.
집에 가져가야 할 짐이 많으면 춤을 출 수 없다. 잡은 것을 놓아야 춤을 출 수 있다. 역도가 춤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가 들어야 할 것이 너무도 무겁기 때문이고, 기구를 들고 추는 춤도 춤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물건들을 몸에 달라붙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육중한 물건을 들고 추는 춤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춤은 소유가 아니라 무소유를 담는다. 춤추는 이의 손과 발은 아무 것도 소유를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춤은 그렇게 아무 것도 갖지 않기에 '끙끙' 움직이지 않고 '훨훨' 난다. 어떤 예술보다도 도구의 의존성이 가장 낮다. 노래는 악기를, 그림은 화구를, 글씨는 먹과 종이를 바라지만, 예술은 맨 손에 맨 발이어도 된다.
춤추는 사람은 벗는다. 형식상 가장 많이 벗어야 하는 예술이 춤이다. 옷도 벗고, 신발도 벗는다. 산발을 해도 괜찮다. 몸을 무엇보다도 많이 보여준다. 문명의 옷, 신분의 옷, 자격의 옷을 벗는 것이 춤의 바탕이다. 몸만으로 말한다.
{장자}에는 백정이 소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른바 '포정해우'( 丁解牛)라고 불리는 [양생주](養生主)의 고사다. 포정의 동작 하나 하나가 바로 상림의 춤에 맞았다(合於桑林之舞)는 이야기로, 상림의 춤은 상(商)의 탕왕(湯王)이 상림이라는 곳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춘 춤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이야기가 바로 생명을 기르는 것과 상관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훌륭한 백정[良 ]은 1년에 한 번만 칼을 바꾸면 되지만, 보통 백정[族 ]은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꾼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9년 동안 칼을 썼지만, 방금 막 숫돌에 간 것 같다. 왜? 소의 마디에는 사이가 있고 나의 칼은 두께가 없으니, 두께가 없는 것으로 사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갈 뿐인 것(以無厚入有閒)이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그가 양생을 알았음을 나타낸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생명을 아는 것이요, 생명을 아는 것은 가장 아름답다'는 명제가 여기에서 도출된다. 춤은 단순히 몸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몸을 기르는 것이 바로 춤이다. 춤으로 몸을 기를 때 가장 아름답다. 우리가 무용수의 몸매를 아름답게 여기는 것도 그들은 춤으로 삶을 기를 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맨 몸으로 삶을 기른다.
우리의 신체 자체는 신체 외적인 것에 비해 거의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 신체 속으로는 황금이 들어갈 수도, 명예가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무소유의 예술의 전형이 춤인 것이다. 이러한 맨손 맨몸이라는 '무체'(無體)를 통해, 살면서 얻어온 돈과 이름 같은 '유체'(有體)를 벗어버리는 것이 바로 춤이다. 거꾸로 말해, 춤은 가장 무차별한 예술의 형식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지가 멀쩡하거나 때로는 한 둘 빠지더라도 춤은 언제 어디서고 즐길 수 있는 예술이다. 무차별은 평등의 세계관이며 무의 주요 의미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무를 내세우는 것은, 유로 차별상을 고착화시키는 무리에 저항함이요, 세상에는 '구별'보다 더욱 중요한 '조화'가 있음을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효도관광 버스를 타자.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춤 솜씨를 보자. 비싼 악기도 없는데, 배운 재주도 없는데, 우리는 모두 춤을 춘다. 이렇게 평등한 예술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노래방을 가자. 아이들 손을 잡고 노래방을 가자.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도, 누구나 손을 펴고 발을 띤다. 이렇게 일상적인 예술이 어디 있단 말인가?
9. 극
아쉽게도 극(劇)에 해당되는 순수한 우리말을 찾기 어렵다. 위에서 말한 예술은 모두 노래, 그림, 글씨, 춤이라는 우리말로 범주화되는데, 극은 그냥 극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마당극이라 불리는 '마당놀이'가 있다는 점이다. 마당놀이는 '마당'과 '놀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갖춘 것으로, 마당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형식을, 놀이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줄거리가 담긴 내용을 가리킨다.
마당은 한 마디로 현실이 아닌 가상의, 역사를 넘어선 소설의, 사실이라기보다는 상상의 공간이다. 그 공간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시간도 담고 있다. '한 마당 벌인다'는 것은 허구(虛構: fiction)의 시공으로 초대한다는 뜻을 담는다. 오늘 어떤 마당에서 한 마당 벌인다고 그 곳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은 그 마당이 분명 허구임을 잘 인식하고 있음에도 그 곳에 모여든다. 이른바 '극장'(劇場)이란 그러한 마당을 고정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마당은 곧 극장의 의미를 갖는다. 마당은 그것이 가짜라는 점에서 허구이며, 허구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즐긴다. 마당은 그 자체로는 완전한 무(無)이며, 그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유는 결국 무로 돌아간다. 극장은 비어있기 때문에 쓸모 있는 것이다.
놀이라는 표현은 그 속의 모든 행위를 놀이의 영역에서 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거의 모든 놀이는 좋고 싫음과 이기고 짐을 담는다. 운동 경기에는 반복되는 승패(勝敗)라는 놀이의 요소가, 만화 속에는 아군과 적군이라는 호오(好惡)라는 놀이의 요소가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놀이는 기본적으로 선악의 요소를 한 줄거리 속에서 융해시킨다. 아방타방(我方他方)의 구별은 재미를 위한 것이다. 프로 레스링이라는 극이 수세에 몰리는 주인공이 마지막에 역전을 하는 것과 같다. 이 때 우리는 얼뜻 선만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늘 등장하는 악을 한 편으로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놀이는 무선악(無善惡)의 줄거리를 내재적으로 함축한다. 놀이를 놀이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높이 보기가 필요한 것이다. 놀이터에서 선악이 있음[有]은 놀이터 밖에서 선악이 없음[無] 때문에 가능해진다.
마당놀이는 이러한 점에서 비극과 희극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그러나 서양적 전통에서 그 구별은 너무도 분명하다.
비극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듯, '발견'의 예술이다. 아내가 어머니인 것을 아는 오이디푸스의 발견처럼, 비극은 발견을 극적 요소의 가장 중요한 전개항목으로 꼽는다. 발견을 통해 이야기는 역전되며, 그러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모르면 될 걸, 알아차린 것이 문제다.
희극이란, 채플린이 말하듯, '크게 보기'이다. 인생을 작게 보면 비극이지만, 크게 보면 희극이 아닌 것이 없다. 모두 다 죽는다. 이 얼마나 웃기는 사실인가? 임금도 죽었고, 대통령도 죽는다. 이처럼 웃기며 재미있는 사실이 또 있겠는가? 서안의 진시황릉에서 우리는 한 편으로 놀라지만, 한 편으로 웃는다. 그도 별 수 없었다고.
우리를 비롯한 동양에는 희랍과 같은 비극의 전통이 없다.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초보적인 설명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간단하다. 희비(喜悲)는 음양과 같이 서로 섞여있으면서 돌고 도는 것이라는 인식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세상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만큼 촌스런 일은 없다. 기쁨 속에서 슬픔을 찾고, 슬픔 속에서 기쁨을 찾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상례(喪禮)만큼 희화화된 예식은 없다. 사람이 죽었는데, 한 쪽 구석에서는 웃고 떠든다. 결국 놀이란 한 방향의 길이 아닌 것이다. 심청이도 빠져죽는 듯하지만 훌륭히 돌아오고, 놀부도 잘 되는 듯하지만 결국 망한다. 놀이란 이렇듯 승패가 교차되고 반복되는 것이다.
중국의 경극(京劇)은 브레이트가 상징의 예술로 높게 쳤다. 경극에는 단지 하나의 소품으로 말이 달리고, 시집을 가며, 국정을 논의한다. 극이 반드시 사실일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연속극이 연극을 대체하고, 할리우드의 영화가 독립영화를 압도한다. 연속극과 영화는 이제 자기 영역에서 최상의 모습으로 현실을 '표현'한다기보다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컴퓨터 속의 가상현실은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이다.
그러나 극이 반드시 이러할 까닭은 없다. 극이 시각매체의 우수함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극만이 지닐 수 있는 그 역량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극은 기본적으로 공감(共感)의 영역을 마련한다. 연속극이나 영화가 일방적인데 반해, 극은 그보다는 훨씬 교감이 가능하다. 브레이트는 서사(敍事)라는 형식을 잘 활용했다. 연기자가 관객에게 말하는 연극, 그리하여, 관객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연기자는 오히려 객관적일 수 있는 연극을 그는 주창했다. 그러나 현대극은 대부분 이러한 어울림의 기회를 자의반 타의반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대형화되고, 상업화되었다. 대형화는 볼거리를 만들어주지만 만남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상업화는 돈벌이를 가져다주지만 만날 이유를 만들지 못한다.
극이 이렇게 자본으로 유형화되면서 무형의 만남을 거절함으로써 극예술의 몰락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예술이 가지고 있었던 무형성의 회복이다. 극이 반드시 사실일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말채찍 하나면 말을 달리는 것이요, 가마가 없어도 청사초롱만 있어도 시집을 가는 것이며, 홀(笏)만 들어도 국정을 논의할 수 있는, 무형의 상징이 절실하다. 극은 더욱더 작아져야 한다. 배우도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일인다역이면 더 좋다. 왜냐하면, 극은 수렴(收斂)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의 지향처는 확대가 아닌 축소이며, 복잡이 아닌 간단이며, 유형이 아닌 무형이다.
오늘날의 극을 대표하는 시네마는 이와는 다른 무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복제의 무한성이다. 이제 필름은 더 이상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복사는 무궁무진하며, 전파는 주마가편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사이버테러는 주로 성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바로 복제의 무한함 때문이다. 나의 사진은 데이타 베이스에 등록되어있고 누구든 이를 돈을 내고 찾아가면 된다. 그 사진에 대한 권한을 내세우는 것은 이미 폭력적인 네트워크의 위력 속에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다중의 폭력 앞에서 개인은 목소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정적인 역량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시대의 복제성은 정보의 공유라는 엄청난 사건을 가져다주었다. 더 이상 정보는 자본주의의 희생양 |
(07.01⌒23:15:48, Hit : 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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