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영 - 푸르른 소멸•49
- 플라스틱 플라워
마을 입구, 에덴화원에서는 생화 대신 플라스틱 플라워를 판다, 그 집에 들어서면 꽃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판이다, 도나 에이스 아에테르남 레퀴엠, 뜻을 아는 사람도 없지만 물어보는 사람도 없다, 흠칫 궁금한 표정을 들키면 검은 외투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주인 남자는 어김 없이 중얼거린다,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리니 네 피는 이제 휘발하지 않을 것이며 뼈와 살은 더 이상 부식하지 않으리라, 도나 에이스 레퀴엠, 그럴 때면 입술 사이로 흰 송곳니가 드러난다
몇 년 후
마을에는 집집마다 플라스틱 플라워가 피어 있다 창백한 달 빛 아래 검은 개 한 마리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다
(음악) 미완성 레퀴엠 d단조 K.626이 흐른다
다시 몇 년 후
공동묘지 앞 정류장, 낡은 시외버스가 먼지를 날리면서 멈추어 선다, 창 밖을 내다보던 아이가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묻는다, 엄마 저기 저 도나 에이스 레퀴엠이 뭐야, 방금 올라 탄 사내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
2003년 1월 8일
라엘리언 무브먼트* 한국 지부 대변인 신디氏(44)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영생이며 그 수단은 인간 복제"라고 단호히 말했다
* 라엘리언 무브먼트는 2002년 12월 최초의 인간 복제 탄생을 주장했던 클로네이드사의 모체이며, 지구상의 생명체는 외계인류에 의해 DNA의 유전자 조작으로 창조됐다고 주장하는 종교 단체다.
박제영-처음 나는....그리고 이제 나는
처음 나는 발목 쯤 잠기는 얕은 시냇물이려니 생각했소
그냥 쉬 건너가서는 젖은 발목 툴툴 털면 되려니
뒷짐지고 유유작작 건널 수 있으려니 생각했소
모가지가 잠길 때까지도 설마 한 나는
머리까지 다 잠겨 그 안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이것이 江인 줄 알게 되었소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나를 적시는 유일한 江
어머니 자궁 속 양수와도 같은 강
그런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이제 나는
당신을 떠날 수는 없는, 물풀이 되었소
박제영 - 푸르른 소멸•19
- 봄의 꽃을 바라보다
퇴원길, 도로변 흐드러진 봄의 꽃들을 바라보다
일순 피었다 저리 휘우뚱 지고마는가 봄의 꽃들 여름이 지나고 한바탕 장마가 지난 후 다시 가을이 오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산과 들이 나무와 풀들이 지고 말 꽃들을 피울 것인가 한줄 바람에도 얇은 햇살 한줌 스치어도 수이 지는 꽃들이란 수직으로 추락하는 목련이든 빗살쳐 미끌어지는 벚꽃이든 제 아무리 낮게 엎드려도 그예 흙으로 돌아가는 민들레든 생이 너무 무거운 존재들 그렇다면 봄날 꽃들을 바라보는 일은 결국 자기를 들여다보는 일인터 붉게 달뜬 몸이 추락 직전의 꽃처럼 아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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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리얼판타 창간호 수록
박재영 – 소재들, 열여섯번째 이야기
모월모일 날씨 우울 시베리아를 건너 온 북서풍이 골목을 휘돌아 나가고 있음, 이렇게 시작하자, 몇 건의 계약이 취소되고 직원들 월급을 위해 은행 대출계에 다녀왔던 이야기는 빼버리자, 다음 달이면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말도 진부하다, 다만 오늘도 어제처럼 퇴근했고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 집에 돌아왔다고, 그 풍경들, 가령 손님 없는 이발소, 트로트만 틀고 있는 레코드방, 여전히 재고정리 중인 구두가게, 없는 게 없다는 만물상점, 그 앞으로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좌판 너머 지지리 궁색한 표정들, 숙식 제공 스티커로 도배한 전신주에 매달린 낡은 갓과 흐린 알전구 아래 잠든 취객의 구부러진 그림자 뒤로 번뜩이는 고양이의 인광, 그래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면 거기 나의 집이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만을 기록하자, 내 生이 휘발되었다는 불길한 이야기는 쓰지 말자
박제영 - 푸르른 소멸•14
- 노을
노을에 잠기면 억새들은 어느새 수천의 붉은 실핏줄들이다
바람 따라 출렁거리는, 땅과 하늘의 기슭에 즐문(櫛紋)의 퇴적층을 만드는
바람 따라 출렁거리는, 이윽고 그 경계를 범람하고야마는
저것을 지중해 너머에서 본 적이 있다
올레, 올레, 자파테타* - 파국을 예감하는 직전의 소리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투우사의 붉은 천이 흔들리고 검은 소는 질주한다
네 개의 은검이 등에 꽂히고
마드리드의 석양 아래 검은 숫소는 쓰러진다
일순 적막의 모래 위
산 자와 죽은 소, 마주 선 그림자 사이로 번지는 붉은 피
박형, 이제 내려가자구
억새 축제를 끝낸 일행이 소매를 잡아끈다
툭, 기억이 끊기고
사람들은 어느새 막걸리를 돌리느라 여념이 없다
차창너머 낮게 엎드린 명성산,
제 울음을 삼키고 있는데, 붉어지는데
* 자파테타(zapateta) ∼ 플라멩고에서 무희가 발을 구르는 동작
- 월간 춤(2001년 8월호) 수록
박제영 - 푸르른 소멸•7
- 적색등에 멈추고 바라본 풍경이 낯설어
저 멀리 황색등, 투비 오어 낫투비
생을 유혹하는 타나토스의 눈 빛, 그리하여 죽음을 예감하는
언제고 붉은 시체로 그에게 다가가리라
적색등에 멈추고 바라본 풍경들이 낯설다 저기 저
불순물들 저 길 위 덮어버린 소음들 매연들 매음들
너희 목숨은 내가 관장하리니 이 순간 아니 모든 것이 상관없어
너희는 죽음의 쾌락을 즐기라 이 속도와 속도의 열락을!!
타나토스를 향해 질주하는 한 없이 열린 폭주족들 희열에 들뜬 굉음들
횡/단/보/도/ 생을 담보한 흰색 줄을 따라
불안에 떠는 아이들의 손들, 높이 쳐들린*, 살려달라고,
길 잃은 어린 양을 구해줄 천주는 교회당 벽 속에 갇히고
갈래갈래 찢어진 길 위로 쏟아지는 한 줌 햇살이 눈이 부신
하오
반대편 차선의 삼중추돌, 실려가는 주검들
정오의 희망곡이 희망에 찬 노래들을
무심히 내보내는데
뒷 차의 날카로운 크랙션이 자꾸만 자꾸만 불쾌하다
심장부터 차오르는 살의, 殺意
룸미러 속 타나토스의 푸른 눈 빛
박제영 - 보험에 얽힌 잔인한 생각
#1. 보험금을 노린 사기단 세 명이 어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2. 1517년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면죄부가 발행되자 루터는 이를 사기라고 주장했다
#3. 오전에는 보험설계사가 와서 내 삶을 설계해주겠다고 일장 연설을 하고 갔다
#4. 오후에는 선교사가 와서는 내 죽음을 설계해주겠다는 것이다
#5. 여의도에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보험회사 빌딩과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나란히 서 있다
#6. 옴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모든 경전과 모든 보험 약관이 실은 똑같은 것임을 밝혀내려던 수도사들의 죽음을 다룬 소설이다
#7. 생명보험도 들고 교회도 착실하게 다니던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아내가 보험금을 타던 그 날 그도 천국에서 줄을 서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영생이라는 보험금을 받으려고 말이다
박제영 - 푸르른 소멸 12
- 보도블럭의 껌자국
흠칫, 인기척에 돌아보면 보도블럭의 검은 껌자국들 낮게 엎드려 있다 희한하게 작은 껌자국이 보이고(그는 아주 어릴 때 친구였을 게다) 유난히 큰 껌자국도 보이고(그는 한 때 나의 보스였나 보다) 때로는 거친 껌자국도 보이고(그는 나와 심하게 다툰 다음 뱉어진 모양이다) 때로는 제법 흰 껌자국도 있다(그는 누구일까)
고개를 돌리고 이내 나의 두 발은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진행중이다 진행중이란 무엇이지? 여전하다는 것은 무엇이지? 어디로 가는 것이지? 이 상투적인 질문조차 대답 못하면서 나는 하나의 문장을 쓰고 말았다 그게 지금 나의 일상이고 진행중인 일생이다 가끔 돌아보면서 껌자국을 세어보기도 하지만, 껌을 씹다가 길바닥에 버리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더 이상 나의 문장은 진행되지 못한 채 마침표를 찍고 만다 도중하차 퉷, 그의 입에서 튕겨져 나온다
어느날 그가 날카로운 끌로 나를 떼어낼 것이다 떼어내주었으면 좋겠다
보도블럭은 너무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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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22:55:33, Hit :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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