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소멸•59 - 녹색등과 적색등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박제영
녹색 燈이 켜졌다
백만년 전의 유전자 기억을 따라, 한무리 누우떼가 세렝게티 평원을 횡단한다
모천(母川)을 찾아, 붉은 연어떼가 태평양을 횡단한다
이윽고 사람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적색 燈이 켜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직립보행 이래 인류의 자서전이란 그런 것이다
(수정 후)
푸르른 소멸•59 - 녹색등과 적색등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박제영
녹색 燈이 켜졌다
백만년 전의 유전자 기억을 따라, 한무리 누우떼가 세렝게티 평원을 횡단한다
모천(母川)을 찾아, 붉은 연어떼가 태평양을 횡단한다
이윽고 사람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적색 燈이 켜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교회를 짓고 절을 지어왔다
직립보행 이래 인류의 자서전이란 그런 것이다
(수정 전)
[박제영] 푸르른 소멸•38
- 카메라 옵스큐라
#1. 빛의 제국/ 낮
줌인 아웃, 포커스가 맞춰지면 철제 침대 낡은 시트 위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창살 틈으로 한줄기 빛이 들어오고 벽 모서리로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남자 : (벽을 향한 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그리하여 모든 삶은 빛에 기대었으니...(창틀을 바라보면서) 신민들아 빛이 너를 구원하리라
남자의 발 밑에 개역한글 성경이 펼쳐져 있다 창세기 1장 3절 위로 약한 조명, 클로즈업,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페이드 아웃
(음악) 세인트 케이트 존의 Where Art Thou가 흐른다
페이드 인
#2. 어둠의 방/ 밤
복도의 푸른색 조명이 창틀 사이로 새어들고 어둠 속에서 서서히 형체가 드러나는 여자, 벌거벗은 채 장난감 아이를 안고 서성거린다
여자 : (아이를 바라보면서) 알겠느냐 이 에미는 물의 여신, 누(Nu)란다...태초에 아무 것도 없었느니 모든 삶은 공허하구나...(아이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내 딸, 너 자존자自存者여, 다만 스스로 있으리라
여자의 몸 아래서 위로 카메라 이동, 장난감 아이의 얼굴에서 정지, 아이의 눈동자 클로즈업
아이의 눈이 대형카메라의 렌즈로 디졸브된다
#3. 사진관
전형적인 70년대 흑백사진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두 딸이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어색한 표정으로 서있고 사진사는 이제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사진사 : (뒷모습만 보인다) 자 좀더 크게 웃으시고...
가족들의 어색한 웃음과 함께 조명이 터진다 현상된 가족사진으로 디졸브, 사진 속에 흐릿한 글씨 서서히 클로즈업
삶,에,대,한,모,든,진,술,은,단,지,편,견,에,지,나,지,않,는,다
[박제영] 푸르른 소멸•26
- 사내들
사내 #1
하루쯤 제끼고 밤새 술을 마실 수도 있잖아 해가 지는 것이 하루살이에게는 생애를 마감하는 비장함이겠으나 샐러리 인생이야 어차피 간단없는 일상의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려니 탓하지 말라구, 부박(浮薄)하다고, 어리석다고
사내 #2
그거 알아, 내가 왜 예수 형님을 존경하는지, 예수 형님이 말이야 12명밖에 안되는 애들 데리고 다 깨부셨잖아 그것도 맨주먹으로 말이야, 연장 들고 쪽수로 덤비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애들을 이단엽차기로 깨버리고 로마를 전부 나와바리*1로 만들었잖아, 그것 뿐이냐 베드론지 하는 꼬봉이 배반했을 때도 “괘안타, 니 잘못 아이다” 그랬거든, 그러니 니도 교회 나와바라*2
사내 #3
일단 들어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야, 나도 처음엔 의심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 우리는 다 한 가족이야 행복해질 수 있어, 황금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나누어주려는 거지, 네 꿈을 이룰 수 있다니까, 그래도 네가 제일 친하니까 이야기해주는 거지, 아무한테 이러지 않아
사내 #4
잘 되었네, 그럼 나도 연예인 하고 술 한번 먹을 수 있겠구만, 내가 조금 꼬부쳐논 거 투자할 테니까 연결시켜 줄거지, 거 있잖아 요즘 잘나가는, 그애도 데리고 있다며, 그나저나 에이즈 걸렸다는 거 사실이냐
사내 #5
그놈이 다 그놈이지 뭐, 한 놈이라도 제대로 된 놈 보았어야 말이지, 이번에는 다시 경상도가 해먹겠지, 내가 안찍어도 결과는 뻔하지 않겠어, 경상도구 전라도구 다 깡패새끼들이야 정치한다는 놈들 말이야, 들으면 어때,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사내 #6
이곳에 오면 그래도 마음이 편해, 자 마시자고, 산다는 게 뭐 별 거 있겠어, 그냥 한잔 쭉 들고 취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누가 그랬잖아, 술 잔 속에 별이 있고 달이 있고 인생이 있고 술 한잔에 시름도 잊고
사내 #7
영업 끝났습니다 자리들 정리하고 계산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쉬운 분들은 내일 또 오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택시! 택시! 따블! 안양 따블!! 부천 따블!!! 분당 따따불!!!
새치기 하지마, 누가 새치기 했다고 그래 이거, 어, 택시! 일산 따블 따!따!블!
*1. 나와바리 ~ 조직폭력배들이 관리하는 구역의 틀린 말
*2. 나와바라 ~ 나와봐라의 틀린 말
박제형 - 소재들, 네번째 이야기
관찰 1
딱딱함, 그 각질의 힘으로 진화를 견뎌낸 족속,
달팽이 아직도 잎새를 건너고 있다.
관찰 2
부드러움, 그 연질의 힘으로 진화를 버텨낸 족속,
풀잎이 그 연한 속살을 흔든다.
관찰 3
빠름, 그 속도의 힘으로 진화를 이겨낸 족속,
새는 지금 달팽이를 노리고 있다.
관찰 4
느림, 그 정지의 힘으로 진화해온 족속,
거미는 조금의 미동도 없다.
결론
숲은, 그러면 숲은 이 모든 속성을 아우르는 족속이다.
진화를 다스리는 유일한 족속이다.
의문
나는 어떤 족속인가
박제영 - 소재들, 일곱번째 이야기
문상이란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보다는 남은 자와의 관계를 지불하는 의식, 부조금이란 사자가 지상의 마지막 톨게이트를 지날 때 지불해야 할 통행료를 대납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남은 자들의 슬픔은 그러나 결국 죽은 자에게 닿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속이 붙는다 시속 140킬로미터 어둠 속을 질주하는 것은 이 순간 무엇이지, 무엇, 퍽, 무인카메라의 후레시가 터지고 일순, 어둠 속에서 제 몸을 드러낸 과속의 덩어리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담배 한대를 문다 꽃은 어디가고 대궁만 남은 민들레를 보다가 낮게 엎드린 대궁을 흔들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풀 아래 뿌리 쯤에서 이 순간 벌어지고 있을 우주운행에 관한 비밀들 - 벌을 잡아먹다 말고 도망치고 있는 스라소니거미와 제 몸을 말고있는 쥐며느리의 긴장에 대해서, 다음달 과태료를 내면 그 뿐일 이 우연한 사건에 대해서
[박제영] 푸르른 소멸•39
- 헤라클리투스의 다리*
프롤로그
강의 범람이 결핍을 낳고 결핍이 실존을 낳고 실존이 문명을 세웠다
#1. 이천년 전의 지식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르면서도 정작 강은, 어느 것에도 젖어들지 않는다 어느 목숨 뛰어든다 한들 강은, 제 흐름을 멈추고 돌아보지 않는다 강은, 세상의 모든 유심(有心)을 다 담아내고도 무심이다
#2. 이천년 동안의 업보
젖지 않고 건너기 위해 다리를 세우지만 젖지 않고는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다리를 세우고 둑을 쌓는다 해도 차면 넘친다는 이치를 알면서도 다시 모래 둑을 쌓는다
#3. 이천이년 여름 전세계가 물난리를 겪고 있다
얼마나 더 범람해야 깨닫게 될 것인가 범람은 곧 결핍의 드러남이고 그 칼끝 위의 순간이 비로소 실존의 시간이다
에필로그
제방 아래 강이 흐른다 다리 위로 사람들이 강을 건너고 있다
박제영 - 푸르른 소멸•4
- 여전히 부재한
피씨의 씨피유에 저장된 당신의 기억들이
- 알고보면 0과 1의 조합이 만들어낸 단순함들이겠지만
어느 일순 사라진다. 재생불능의 상태는 일상적 경험이 되었지 않은가
부재의 가능성을 내재한 아니 이미 혹은 여전히 부재한 존재들
0과 1 사이에 흐르는
소름끼치는 당신과 나의 영혼을 뒤흔드는
전율, 電律
피씨를 꺼라 씨피유 대신 당신의 심장을 켜라
박제영 - 푸르른 소멸 10 - 구체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아내의 입덧으로 냉장고엔 몇 달째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문을 열 때마다 영혼의 후각을 자극하는 비릿내
창백한 주검의 살에서 풀어지는 푸른 바다의 삶에 대한 기억, 냉장고로도 냉동시키지 못한
저 고등어는
어쩌면 삶도 죽음도 아닌 경계에 갇혀버린 유령일지도 모르겠다
썩어 양분이 되는 명징한 죽음도, 그물에 걸리던 그 순간까지 살아내기 위해 투쟁했던 바다의 삶도 아닌
그림자와 같은
냉장고를 열면 그곳엔 어김없이
절여진 주검의 차가운 눈빛과 그 눈을 통과한 바다의 비릿내가 현기증처럼 몰려든다
구체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설레는 일이냐
구체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설레는 일이냐
절여진, 냉동된 저 그림자와 같은 단지 한덩어리의 유령에 비하면
문을 열고 나를 들여다보는 당신과
당신을 들여다보는 등 뒤의 시선이
중첩되면서 서서히 냉장고의 문이 닫힌다.
어둠, 막이 내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어부의 그물소리
푸르르 떨리는 바다의 지느러미들
푸르른 소멸•59 - 녹색등과 적색등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박제영
녹색 燈이 켜졌다
백만년 전의 유전자 기억을 따라, 한무리 누우떼가 세렝게티 평원을 횡단한다
모천(母川)을 찾아, 붉은 연어떼가 태평양을 횡단한다
이윽고 사람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적색 燈이 켜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교회를 짓고 절을 지어왔다
직립보행 이래 인류의 자서전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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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15:16:43, Hit :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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