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을 완전히 잃었을 때 두려움과 절망의 눈물을 모두 쏟아버리는 데 필요한 시간은 꼭 한시간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시력을 잃은 뒤에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부모와 친척,친구들 역시 그 사실을 잊었다.”
암흑의 절망을 극복하는 데 한시간이면 족했다는 남자. 엄마의 눈을 피해 버스 정류장 지붕에 기어오르고,체조봉에 거꾸로 매달려 교사들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말썽꾸러기는 1994년 36세의 나이로 산 레모 뮤직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며 세계 음악계에 등장한다. 이후 97년 내놓은 음반 ‘로만차’는 시적 이미지의 미성으로 클래식 팬을 사로잡으며 1800만장이 팔렸다. 무대를 누벼야 하는 오페라 가수에게는 치명적 장애를 딛고 이룩한 성공이었다. 이탈리아의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45)의 이야기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어렴풋이 빛과 색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약시였던 보첼리는 12세 때 기숙학교 축구 게임 도중 상대팀 선수가 찬 공에 오른쪽 눈을 맞아 실명한다. 그렇다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왕성했던 꼬마에게 닫친 불행,이어 그 장애를 극복해가는 눈물의 수기?
보첼리의 자서전 ‘침묵의 음악’은 독자의 기대를 깜찍하게 배반한다. 한시간의 눈물,일주일의 적응기,그리고 끝이다. 성장에서 가수 데뷔,성공까지 삶을 반추해나가는 사이 보첼리는 그가 겪은 젊은이다운 방황과 고뇌를 털어놓는다. 애인의 바람기에 괴로워하고 변성기를 거치며 변해가는 목소리에 절망하기도 했다. 간혹 장애인에 대한 특별 대우에 마음 상해한 적도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기대’와 달리 그는 시력 장애를 그저 불편한 파트너쯤으로 여겼다. 사실 바람둥이 보첼리에게 바에서 만난 아가씨의 외모를 짐작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심지어 독자는 책을 읽으며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가족과 친구들이 잊었듯이. 그리고 그의 솔직함과 정열,낙천적 성품에 감염된다.
보첼리는 정규 성악 교육을 받지 않은 법학도 출신이다. 이탈리아 피사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동안 변호사로도 활동했던 그는 “사랑이 필요하듯,내겐 음악이 필요하다. 음악은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다”는 일기장 고백처럼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음악계를 기웃거린다. 국가 자격시험 준비를 위해 대학 후 과정에 등록한 사이에도 그는 칸초네를 녹음해 레코드사에 보냈고,저녁에는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불렀다.
대중 가수로 첫발을 내디뎠던 그는 성악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의 방향을 수정한다.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에 대한 정직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게된 뒤 성악가로서 새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포도주를 끊고 체중을 감량했으며 공연을 위해 침묵을 고수했다. 하지만 재능이 기회를 가져오는 건 아니었다. 아내가 직장에 나간 사이 보첼리는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히터를 끄고 노래를 불렀다. 안마사나 전화교환수로 취직하려고 생각할만큼 힘겨운 1년을 보낸 끝에 그는 팝스타 주케로의 콘서트 무대에 테너 파바로티 대신 참가하는 행운이 주어지면서 성공의 기회를 움켜쥔다. 그리고 산 레모 가요제를 통해 보첼리는 비로소 세계적 성악가가 된다.
어릴 적 베니아미노 질리,엔리코 카루소,델 모나코의 음악을 들으며 매료됐던 일,기숙 학교 학년말 행사에서 처음 독창 무대를 가졌을 때의 감격,아저씨의 권유로 음악 경연대회에 참가해 좌중을 압도한 일 등 어린 재능이 일으킨 기쁨과 소동을 보첼리는 이렇게 기억했다. “노래가 다 끝나기도 전에 말 그대로 천둥 같은 박수 소리가 뒤덮었다. 진정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운명의 신호였다.”
어머니도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아파 병실에서 몸부림치던 어린 보첼리가 옆 병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일순 잠잠해진다. “아이가 갑자기 평화를 되찾은 이유를 알아 보려고 애썼어요…그리고 옆방에서 음악이 들려온다는 것을 알았답니다…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우리 아이가 평온을 되찾은 게 바로 그 음악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했답니다.” 이탈리아 특유의 떠들썩한 가족애 속에서 천재는 길을 찾아간 것이다.
장애인의 비장한 수기를 기대한 이들에게 ‘침묵의 음악’은 실망스러울지 모르겠다. 보첼리의 글에서는 소외받은 이들에게 풍기는 음습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발랄한 청춘의 방황기 같은 책을 통해 우리는 평범한 사실에 도달한다. 육체적 장애는 삶에 장애가 아니라는. 책은 대필 작가 없이 보첼리가 이탈리아어로 직접 썼으며 이탈리아어 전문 번역가 이현경씨가 번역했다(안드레아 보첼리·1만1000원·황금가지).
이영미기자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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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11:34:44, Hit :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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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르의 여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