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사건; 詩」 류길수(시인)
계간 시평; 시와 반시 2003년 여름호에서
1. 부재의 조작
나는 부재를 조작하려 한다.
시간의 뒤틀림을 왔다갔다하는 행동으로 변형시키거나
리듬을 산출하거나, 언어의 장면을 열고자 한다.
-롤랑바르트
비오는 저녁.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존재를 모른다. 골목은 끝없이 휘어지는 막다른 골목이면 적당하다. 텅 빈 현실의 현깃증. 도대체 이 욕망과 부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의식과 무의식은 이미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지 오래됐다. 저기 곧 그에게 포획될 욕망의 모호한 대상.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향해 돌진하는 남자. 죽음은 이렇게 불현듯 찾아오고 그 순간 어떤 부재는 조작된다. 대상의 목을 짓누를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남자. 하지만 정체 불명인 그의 이드(id)는 에너지가 넘쳐난다. 미안해…이럴 수 밖에 없었어…그냥 무의식이 시켰으니까…아주 우연히, 우연히 너…하나의 긴장된 육체가 선택된 것 뿐이야…이것만이 환멸의 세상을…배반의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미궁에 빠진 희대의 연쇄살인사건. 범인의 윤곽도 잡지 못한 채 허방만 짚는 한심한 수사관. 사건은 영원히 미제로 남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범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첩에 빼곡이 들어앉아 있는 용의자들. 루이 알뛰세르, 조르주 바따이유, 샤를르 보들레에르, 랭보, 프로이드, 아…프란쯔 카프카…….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 누구든 선택해야 할 시간이다.
최고의 사기꾼인 시인. ego가 매우 강한 그들은 그 시각, 허공을 향해 질문 공세를 계속 퍼붓고 있는 중이다. 환상의 바벨탑을 쌓았다가 다시 무너뜨리기도 하고 이미지에 이미지를 덧씌우기도 하며, 우연의 힘에 몸을 디밀었다가 공포와 절망으로 몸서리치며 주체를 해체시키기도 하면서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다. 거미줄처럼 자신을 얽어매는 사슬을 걷어내기 위해 부재를 조작하는 중이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이제 하나의 완벽한 살인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질문의 꼬리를 물고 계속될 뿐. 모두들 서서히 미쳐간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점점 가까워지는 것.
2. 죽음을 기억하라.
내 마음 밖의 세상을 믿어야 한다.
내 행동의 의미를 믿어야 한다.
기억 못할 지라도
눈을 감고 있어도
세상이 존재한단 걸 믿어야 한다. 난 복수했다.
-영화 메멘토(2001)중에서
기차가 달려간다 터널을 지나 터널로 들어간다 바람이 찢어지며 비명을 지른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몸뚱이를 또 다른 상처투성이 몸뚱아리가 붙잡고 덜컹거린다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와 간혹 섞인 웃음소리가 창마다 가득 잎을 피워낸다 갓 피어난 잎사귀는 추억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다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온 몸에 돌기처럼 돋아난다
별이 떨어져 철로변에 수북히 쌓인다 기억의 시간을 타고 오르던 담쟁이덩굴들은 깊이 잠들었다 나는 희미한 램프를 들고 기차를 기다린다 터널이 계속 이어진다 램프가 깜박인다 기차가 달려간다
-김준연,「나무」(『시와 반시』봄호) 전문
잠들지 말 것. 잠은 추억을 삭제시키는 마법이다. 그렇다면 나는 항상 충만한 의식으로 깨어 있는 자, 시인인가? 과연 이 삶은 사실인 것일까? 나의 주인은 과연 나인 것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그리고 기차는 왜 달리고 있지? 여기가 어디지? 그래 나는 갓 피어난 잎사귀와도 같아 추억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세상이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나의 주인은 '언어'. 문신처럼 온몸에 새겨진 상처, 상처투성이인 몸뚱아리에 돋아나는 '다 하지 못한 말들'. 그래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어. 기차는 추억일 수는 있지만 실체는 결코 아닌 것. 그래도 나는 희미한 램프를 들고 기차를 기다리려 한다.
끝없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터널. 나는 이제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자, 시인. 그래 이건 꿈일지도 몰라. 죽음과 근친인 꿈.
3. 원래 없던 것
한 무리의 남녀가 차에서 내린다
그들은 라켓도, 공도 없는 정구 게임을 한다
나는 정구장 밖에 서 있다
모두들 갑자기 나를 쳐다본다
나는 없는 정구공을 주워서 그들에게 던져준다
라켓도, 공도 없는 게임은 계속된다
-영화 Blowup(1966)의 장면
한때 독수리로 불려지던,
날카로움이 응접실 구석에서
타다 만 휴지조각 같은 검게 그을린 하루를 노려보고 있다
유리창 너머 방부 처리된 허공은
누더기 같은 구름들을 벗어 놓을 뿐
끝끝내 시간의 길을 안내하지 않는다
수없이 집어삼킨 죽음의 식욕으로
무덤의 낙인이 찍혀버린 그 날카로움 속에서
가끔 밤이면 붉은 달이 부화되기도 한다
그저 죽음밖에 낚아챌 줄 몰랐던 것,
따뜻한 죽음들이 몸으로 흡수될 때마다
헐벗은 채 떠도는 바람을 감싸 안아 둥지에 품곤 했었다
싱싱한 죽음을 겨냥할 수 없는 고정된 날카로움은 슬프다
아득한 소실점만 노려보는
깜깜한 그림자의 흔적으로만 고여있다
독수리는 다 파내어 버려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습관만 오래오래 진열된다
-배용제,「박제에 대한 명상」(『시와 반시』봄호) 전문
나는 egoist이다. 일종의 구경꾼인 셈이지. 나는 한번도 이드(id)에게 지배당한 적이 없다. 이 시스템을 적절히 이용하며 경험을 쌓아갈 뿐이야. 릴케가 말했잖아. 언젠가 마치 우연처럼 시의 첫 행이 내게 올 것이다라고. blowup! 확대. 나는 저 마술의 구름을 찍으려 카메라를 들이댄 것뿐인데 허공은 끝끝내 시간의 길을 보여주지 않는군. 하지만 우연히 앵글에 들어온 박제된 독수리. 내 권태 속으로 확대되어 들어온 욕망 덩어리. 그래 무덤의 낙인이 찍혀 버린 건 저 독수리의 공허한 날카로움 뿐만은 아닐 테지. 그저 죽음 밖에 낚아챌 줄 몰랐던 나. 가끔 따뜻한 죽음을 품고
잠들곤 했지만 언제나 깨어 있던 나. 하지만 그 죽음이 가짜 죽음이란 걸 알았을 때, 싱싱한 죽음이 확대되어 내 욕망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슬펐다. 그건 일종의 농담 같은 것일 테니까. 가끔 내 카메라에 찍히는 우연일 뿐이니까. 아득한 소실점.
내가 현상한 인화지에는 깜깜한 그림자만 남아 있을 뿐. 진짜 죽음은 온데 간데 없다. 삶이란 그저 습관일 뿐이고 다 파내어 버려진 독수리의 박제이거나 발목이 푹푹 빠지는 거대한 부재의 수렁일 뿐이니까.
4. 두드리라 그러면 열리리라
이제 양들은 조용해졌나?
-영화 양들의 침묵(1991)중에서
구급차는 언제나 너를
스쳐 지나가고
네가 탄 총알택시
선글라스 낀 택시 기사는 장님이라네
낰, 낰, 낰 나킹 온 헤븐스 도어, 이봐요 의사선생
지금 저 산모는 가랑이로 신생아를
삼키고 있잖소, 낰, 낰, 낰, 앞문은
폐문, 낰, 낰, 낰 뒷문도
폐문, 옆집 문을
두드렸죠, 낰, 낰, 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핥아라, 핥았죠, 맄, 맄, 맄
천국의 문고리를, 맄, 말장난은
죽음의 장난
집회서 29장 28절에서 튀어나와 뺨을 후리는
육손이, 육손이, 당신은 손가락이 여섯 개
아버지가 여섯 개
-김언희,「Knock, Knock, Knock 」(『시와 반시』봄호) 전문
나는 경험을 믿지 않는다. 오래된 경험은 실수를 반복할 뿐이다. 나는 순간에 몸을 맡긴다. 그건 대체로 정확하니까. 지금껏 거의 실수가 없었잖아? 나는 얼마나 많은 부재를 확인해 왔던가. 그것도 한번도 남에게 들키지 않고. 야누스. 몸서리치는 추함. 이 모든 것은 폭발하는 이드(id)의 에네르기 덕분이다. 당신들은 언제나 나에게 포획될 수 있는 대상. 구급차는 언제나 당신을 스쳐 지나가고 당신의 택시기사는 장님이거든. 애초부터 어머니는 부재였지. 생산자로서의 산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럼 아버지는? 집회서 29장 28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빚쟁이일 뿐
이지. 삶은 그 놈이 우리에게 덮어씌운 일종의 죄 같은 거야. 저것 봐, 산모가 가랑이로 신생아를 삼키고 있잖아. 포획을 원치 않는 거지. 나를 믿어봐. 나의 직업은 당신의 죽음을 앞당겨주는 시인. 뭐? 그렇다면 너의 주인은 누구냐고? 이데올로기라고 들어봤어? 낰, 낰, 낰, 그래 천국의 문이나 실컷 두드려라. 당신에겐 앞문도 뒷문도 폐문일 테니까. 그래도 자꾸 두드려봐.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죽음의 말장난. 그 장난이 끝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시스템으로부터 풀려날 거야. 그때까지 내가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리지.
5. Dr. Shipman
그의 방법은 모르핀 투여
환자들은 모두 의자에 앉아
편안히 쉬는 모습으로 잠들어 갔다
너무도 신뢰해 마지않던 주치의에 의해
-런던 Goldsmiths College 유학생, 이지연의 글 중에서
우리들이 흔히 모르고 지나지만 하늘을 날던 새가 잠시 제자리에 서고 몸을 흔들던 풀 숲이 한 순간 움직임을 잃어버리는 감쪽같은 시간이 있다. 어딘가 먼 변두리에서 한해의 첫 낙엽이 지는 순간이다. 가을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천의 잎새가 하늘을 날지만 최후의 한 잎이 몸을 던지는 순간 숲은 비로소 한 해의 가을을 완성한다. 우리들이 흔히 모르고 지나지만 몸을 추스르기라도 하듯 하늘이 잠시 한정 없이 푸른 것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허만하,「함양 상림에서」(『시와 반시』봄호) 전문
나는 아주 완숙한 시인이다. 마치 그가 존경받는 주치의이자, 영국인들이 말하길 '비 오는 날 아침처럼 너무나 영국적인 신사'이듯. 당신은 본적이 있는가? 하늘을 날던 새가 잠시 제자리에서 서고 풀숲이 한 순간 움직임을 잃어버리는 감쪽같은 시간을. 아, 그것이 바로 저기에 있다! 한정 없이 푸른 그것이 저기 있다. 그러나 감쪽같은 시간이란 사실, 없다. 그건 내가 조작한 시간일 뿐이다. 어느 늦은 가을 날, 먼 변두리에서 한 해의 낙엽이 지는 순간, 감쪽같이 나에게 닥쳐온 욕망의 덩어리다. 죽음의 현신이다. 최후의 한 잎인 당신! 주체인 당신이, 당신의 몸을 몽땅 이 쪽으로 던질 때 비로소 당신의 죽음은 완성된다. 우리가 시간의 포획으로부터 풀려나는 순간인 것이다. 지금 그는 환자에게 쓸 모르핀을 준비하고 있다. 나의 ego는 이미 한 편의 시를 써냈다. 모르핀이 당신의 혈관을 지나고 있다. 당신은 지금 편안한가? 마치 스스로의 몸을 추스르기라도 하듯, 의자에 앉아 편안히 잠 들어가는 당신. 바로 이 순간! 나는 당신을 위해 가을을 완성하는 이 아름다운 시를 읽기 위한 준비를 끝냈다.
6. 몸 둘 데를 모르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가 없소.
결국 이것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입구였소.
자, 이제 나는 떠나겠소. 그리고 이 입구를 폐쇄하겠소.
- Franz Kafka, 『법 앞에서』 중
누구든 늙어가고 죽음은 예고도 없이 우연히, 불현듯 찾아올 거야.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입구.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살아 있는 한, 들어갈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출구이자 입구인 저 구멍. 밀봉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저 문지기는 너무 완강하다. 저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가나. 이제 이 끔찍한 살인을 그만 두어야 한다. 마지막 선택을 해야 한다. 문지기가 떠나기 전에, 저 구멍이 폐쇄되기 전에. 문지기를 죽이든지, 내 정수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든지……. 그런데 저 문, 애초에 있기는 있었나?
*메멘토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2001
*Blowup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 1966
*양들의 침묵 : 조나단 뎀 감독, 1991
*Dr. shipman : 의사, 영국의 연쇄살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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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22:42:37, Hit : 2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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